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전 세계적 저성장 추세에서 그나마 우리 경제를 떠받쳤던 통상이 최근 수렁에 빠졌다. 힘을 앞세운 미국과 중국에 떠밀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를 끌어다 넣는 주요2개국(G2)의 ‘안보 프레임워크’에 우리 통상당국의 설 자리도 사라지고 있다. 특히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에서 ‘화약고’로 불리는 농산물 관세 철폐 카드 등을 내밀면서 국내 정국 혼란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점증하는 북핵 리스크와 뒤바뀐 교역질서에 맞춰 통상전략도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현지시간)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무역대표부는 미국 워싱턴DC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열고 한미 FTA 개정에 사실상 합의했다.
8월 열린 제1차 회의에서 우리 측은 “(한미 FTA 효과 분석을 위한) 공동조사 없이는 개정 협상도 없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했다. 농산물 분야의 관세 즉시 철폐 등을 요구한 미국 측의 거센 압박에 맞불을 놓았던 셈이다. 하지만 협정 ‘폐기(withdrawal)’ 카드를 뽑아든 미국 측의 압박에 이번 회의에서 결국 “한미 FTA의 상호 호혜성을 강화하기 위해 FTA 개정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했다”며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김현종 본부장은 회의 직후 기자간담회를 통해 “국회에 보고, 설명하고 (개정 협상) 절차 개시를 위한 절차를 밟는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결과를 두고 전문가들은 ‘백기 투항’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여론을 감안하면 미국도 막무가내로 나올 수 없다는 오판에 결국 얻은 것 없이 한미 FTA 개정 협상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양측이 평행선을 달려 자칫 한미 FTA 협정이 폐기될 경우 관세 철폐 효과가 사라지면서 수많은 일자리가 딸린 국내 기업의 공장을 미국으로 내주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가 협상 개시를 자발적으로 했으면 협상 시기나 의제를 정하는 ‘맛보기’ 협상 등을 통해 얻을 게 있었는데 백기 투항한 탓에 앞으로도 미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됐다”며 “그동안 서로 간에 이익의 균형을 이루겠다는 상호 호혜적인 통상외교의 전통을 어렵사리 만들어놨는데 동북아 안보질서에서 부수적 취급을 당하는 ‘안보 프레임워크’에 말려 들어가 버렸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통상당국이 여전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산 철강 등에 대한 ‘전면적 관세’와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적용할 예정인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 조치)’, 그리고 발표를 앞둔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 등 미국 측의 공세는 날로 거세지고 있다. 더욱이 북한의 제6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한반도에선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연초 시작된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보복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우리 통상 당국에는 이렇다 할 카드도, 지렛대도 없는 상황이다.
최 교수는 “안보 문제는 일단락돼도 시기가 되면 다시 터지면서 반복되는 문제지만 통상은 지나가면 바꿀 수 없는 국익과 직결되는 사안”이라며 “청와대 자문그룹이 잘못한 것인지, 안보팀과 통상팀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 것인지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존의 FTA 협정 재평가와 통상전략도 전면 재검토하고 다자체제와 양자체제 등의 균형점 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FTA 등 양자 무역협정에만 의존하는 지금의 통상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을 통한 다자외교 무대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정보기술협정(ITA)이나 복수국간서비스협정(TISA) 등을 통해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닿지 않는 무역영토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휴대폰 등 정보기술(IT) 제품의 무관세화가 골자인 ITA의 가장 큰 수혜국가다. 또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서울클럽’과 같은 중견 국가 간 동맹체도 강대국과의 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정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통상본부장은 “배타적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FTA가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차원에서 효용성은 있지만 다자체제는 강대국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장점이 있다”며 “기존 통상전략에서는 다자체제가 ‘액세서리’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뒤바뀐 환경에 맞는 균형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