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창업인 서울시스터즈도 그렇고, GNP트레이딩에서 론칭한 ‘K펍 비비큐’ 등 모두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회사였어요.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한국 음식을 맛보고, 한국 문화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외식 업체들이 해외, 특히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데 전문적인 맞춤형 컨설팅을 하는 리브랜딩 작업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외국인들도 자신의 집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쿡방’ 같은 플랫폼을 꿈꾸고 있습니다.”
안태양(32·사진) 서울시스터즈 대표는 한국인 출신으로 필리핀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유명하다. ‘필리핀 야시장에서 떡볶이를 팔아 성공한 사업가’라는 타이틀이 늘상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평탄하진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대학 진학 후에는 아르바이트에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쥐꼬리만하고, 발버둥을 쳐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개미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때 필리핀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주변 친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모습을 부러워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러던 중 필리핀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행기 티켓 가격도 싸고, 생활비도 적게 든다는 정보를 얻었다. 아르바이트로 악착같이 모은 300만원을 들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국에서의 낯선 생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켰다.
하지만 필리핀 생활이 녹록하진 않았다. 3평 크기의 고시원 같은 방에 들어가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았다. 통신비 부담에 핸드폰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꿈 같은 유학 생활은 절대 아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친구도 없었고, 스트레스를 풀 곳도 마땅치 않아 방에만 틀어 박힌 채 외톨이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갑자기 쓰러졌다. 다음 날인 성탄절에 눈을 떴을 때는 막막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진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때가 2008년 12월 25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심각하게 미래를 고민했다. 이 상태로 한국에 돌아가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미 나이가 25살이고, 3년이란 휴학기간도 아르바이트며 필리핀 연수로 소진해 버렸다. 졸업할 즈음엔 27살인데 제대로 취직을 할 수 있을지도 자신 없었다. 특별히 영어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근근이 버텼던 과외 아르바이트는 경력을 인정 받을 수도 없었다. 사방이 막힌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필리핀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을 생각했다. 딱히 머릿속에 필리핀에서 성공한 한국인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당수의 한인들이 필리핀에 사업하러 왔다가 망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는 숱하게 들었다. 이곳에서 성공하고 돌아간다면 필리핀에서 성공한 1호 한국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필리핀에서 성공하면 나 밖에 없겠다. 필리핀에서 성공하면 한국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경쟁 상대가 없는 나만의 필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간 안태양’을 돌아보니 필리핀 친구들과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가장 행복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음식에 대한 스토리텔링만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먹는 것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이걸 사업으로 연결하면 질리지 않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의 음식점에서 셰프로 일하고 있던 여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필리핀에 제대로 된 사업 아이템이 있으니 여기 와서 같이 하자고 전격 제안했다.
하지만 식당 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야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매주 금요일 밤 10시부터 토요일 오전 10시까지 여는 야시장으로, 당시 마닐라에서 야시장 ‘반체토(Banchetto)’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한 번에 5,000여명이 방문하는 대규모 야시장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계약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5,000명 중 10%만 우리 가게에 들러도 500명이라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성공할 것만 같았죠. 당시 한류에 대해서도 호감이 높아질 때라 한국 여자애들이 한국 음식을 팔면 독특한 아이템으로 주목을 받을 것만 같았죠.”
2010년 3월 도시락과 떡볶이를 메뉴로 정하고 100인분을 준비해서 야시장으로 향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아침까지 목이 터져라 장사를 했지만 결국 2인분을 파는 데 그쳤다. 첫날 매출은 5,000원. 자릿세 10만원에 비하면 매출이 턱없이 적었다. 보관할 냉장고가 없어 음식 재료를 고스란히 버려야 했다. 동생에게는 괜찮을 거라 말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목을 놓고 울었다. 실컷 울고 나니까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당장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과외 하는 집에서 선불로 과외비를 받기로 하고 급한 불부터 껐다. 그 다음 주 금요일이 돌아오자 수중에 가진 돈으로 재료를 사고 음식을 준비해서 야시장으로 향했다. 이때도 12시간 내내 소리를 지르면서 음식을 팔았지만 4인분 팔았다. 그 다음 주는 6인분, 그 다음 주는 10인분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매출이 늘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갔고 어느 날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장사하는 걸 어디서 배웠지?” 생각해보니까 주변의 친척이나 지인 중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전혀 없이 텔레비전을 통해 장사를 봤던 것이다. 가게를 열면 손님들이 줄 서는 ‘대박’ 사업을 꿈꾸었다. 장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장사’를 검색어로 쳤다. 눈에 띄는 책 50권을 골라 엄마에게 리스트를 보냈다. 엄마가 국제 특송으로 보내준 50권의 책을 몇날 며칠 읽고 또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괜찮은 내용이 있으면 실제 장사에 대입해 보기도 하고, 관련된 사람의 뉴스도 찾아보면서 장사를 파고 들었다.
장사를 제대로 하려면 사람의 마음부터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선 주변 상인들의 마음을 얻기로 했다. 한국에서 온 젊은 여자애들이 손님들을 빼앗는다며 달갑지 않게 여기던 현지 상인들부터 고객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사를 마친 후 상인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면서 음식을 선물했다. 부족하지만 음식 맛을 평가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거리를 두고 대하던 동료 상인들이 차츰 마음을 열었고, 장사 노하우도 조금씩 알려줬다. 고객을 맞이하는 자세도 확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힘들면 자신도 모르게 시무룩해지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손님을 맞이하는 얼굴만큼은 화사하게 웃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악착같이 실천했다.
6개월쯤 지나니까 장사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시장은 현금 장사인데, 9월에는 현금을 색(등에 매는 가방)에 쑤셔 넣을 정도가 됐고 어떤 날에는 집에 돌아와 돈을 세지도 못하고 가방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당시 1호점과 2호점을 여동생과 나눠 운영하고 있었는데 10월경 3호점까지 내게 됐다. 이곳도 같은 메뉴의 음식을 팔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3호점은 손님이 별로 찾지 않았다. 1, 2호점의 월 평균 매출이 200만원을 넘는데 3호점만 절반도 되지 않은 것이다.
왜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100퍼센트 맛도 메뉴도 똑같이 팔고 있는데 여긴 왜 안 될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3호점이 다른 점은 안태양 자매가 상주하지 않은 것, 그 하나뿐이었다.
이때 안 대표는 브랜드를 정립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앞으로 사업이 커지면 4호, 5호 등 계속 분점이 늘어날 텐데 모든 매장에 대표가 상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태양이 없어도 브랜드 자체로 고객이 찾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브랜드 관련 책을 잔뜩 사서 읽기 시작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확립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지 디자이너를 고용해 안 대표 자매의 얼굴과 비슷한 캐릭터로 로고를 만들었다. 컬러감, 레시피, 로고송도 통일했다. 이런 작업을 거치고서야 3호점도 매출이 1, 2호점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랐다. 2011년까지 8호점이 나왔다.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인기가 높은 메뉴는 ‘레디투쿡(Ready to cook)’ 패키지로 만들어 배달 서비스도 했다. 매출이 껑충 뛰었다. 월 평균 매출이 1억원을 넘었다. 그녀가 꿈꾸던 그대로 ‘필리핀에서 성공한 한국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던 중 2013년 그녀에게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서울시스터즈의 명성이 높아지자 중국계 회사인 GNP트레이딩에서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GNP트레이딩은 하이네켄, 칭따오 등 유명한 브랜드 제품을 독점으로 필리핀에 유통하는 회사다.
처음에는 자신이 애써 가꾼 브랜드를 넘긴다는 것에 거부감부터 들었다. 구멍가게라도 내 사업을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화교인 조지 노콤 푸아(George N. Pua) 회장은 그녀를 세 번이나 찾아와 설득했다. “너를 보면 어릴 적 내 모습 같다. 내 밑에서 배우고 성공해라”라는 말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비즈니스가 뭔지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그녀는 ‘서울시스터즈’의 브랜드는 자신이 갖는 조건으로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GNP트레이딩 신사업개발본부장으로 들어갔다. 물론 여동생도 함께였다.
GNP 신사업개발본부장으로 일하면서 그가 론칭한 브랜드는 ‘K펍 비비큐’와 ‘오빠 치킨(OPPA CHICKEN)’이다. 월 평균 매출이 각각 2억~3억원, 1억원에 달하며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성공의 비결을 들어봤다.
“오빠 치킨은 생닭을 제외한 모든 재료를 한국에서 들여옵니다. 오빠 치킨에 입혔던 스토리가 ‘이게 진짜(리얼) 한국 치킨’이었어요. 우리나라 치킨 브랜드가 외국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소스 때문이에요. 소스 재료의 70%가 물인데, 물이 비싼데다가 해외 배송하는 도중에 터지거나 상해서 마진 남기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현지 공장에서 소스를 만들면 마진이 크게 오를 텐데 그럼 맛이 좀 달라요. 사실 고객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잘 모를 수 있지만, 브랜드 정체성을 ‘리얼 한국 치킨’으로 잡았기 때문에 모든 걸 한국에서 공수해요. 대신 소스를 농축액이나 파우더 형태로 바꿔서 마진을 높일 수 있는 선택을 해 나가는 거죠.”
안태양 대표가 한국으로 돌아와 새롭게 시작한 서울시스터즈 먹방 영상. 안 대표는 한국의 대표 음식들을 해외에 알리는 플랫폼으로 ‘서울시스터즈’를 활용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3년 반을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우고 2016년 9월 GNP트레이딩을 나와 독립했다. 안 대표의 다음 행보는 외식 브랜드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 컨설팅 사업이다. 이른바 푸드컬처디렉터로서 전문화된 외식 브랜드 컨설팅을 하겠다는 포부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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