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한국 경제는 부실 대기업의 구조조정과 더불어 미래 성장산업으로 발전해나갈 벤처·창업의 발굴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자본시장의 역할이 절실한데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투자은행(IB) 육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IB 육성은 과거에도 여러 번 시도된 해묵은 과제다. 다만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기보다 변죽만 울리는 방식을 되풀이하면서 정책효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런 상황은 새 정부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8월 발표된 정부의 IB 육성방안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초대형 IB를 육성하는 것이다. 국내 금융투자회사의 취약점 중 하나가 왜소한 자본력으로 인해 위험 부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므로 자본 확충으로 대형화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대형화가 성공적인 IB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대마불사의 위험을 조장하는 것 같아 불편하지만 국내 증권사의 규모가 글로벌 기준에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방법이 적절하다면 수긍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는 수신과 대출 기능을 유인으로 활용하는 것인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꼴로 매우 부적절하다.
지난 2013년 자본시장법 개정 당시 정부는 금융투자회사의 기업신용공여 범위를 ‘기업에 대한 신용공여’로 정의함으로써 관련 업무가 자본시장 업무를 제쳐 두고 은행의 고유 업무인 일반기업대출로 확대될 여지를 남겼다. 당시 금융투자회사는 은행 같은 수신기능이 없어 일반기업대출이 크게 확대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상황논리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올해 5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으로 발행어음과 종합투자계좌(IMA)를 통한 수신 업무를 허용함으로써 이제 금융투자회사가 마치 은행처럼 일반기업대출을 취급·확대할 수 있게 됐으며 특히 IMA에 대해서는 판매 한도에 제한 없이 조달자금의 70% 이상을 기업금융에 운용하도록 했다.
한편 지난해 11월 정우택 의원이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현재 자기자본의 100%인 신용공여 한도를 200%로 확대하도록 제안했다. 그리고 올해 2월에는 금융위원회가 신용공여에 대해 기업신용공여 한도를 자기자본의 100%로 확대하고 일반 신용공여와 전담 신용공여를 합산한 한도를 또 다른 100%로 하는 수정안을 제안해 현재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IB에 자본시장 업무와 무관한 일반대출 업무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는 과거의 일반기업대출이 크게 확대되기 어렵다는 상황논리를 스스로 뒤엎은 꼴인데 이러한 정책이 자본시장 기능 확충에 얼마나 기여할지 의문이다.
이번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IB에 자본시장 기능 확충 대신 은행의 고유 업무인 일반대출의 확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의 주요 금융수단인 대출(융자)은 고정수익 방식이므로 원리금 회수가 중요하다. 그래서 안전한 프로젝트 지원용으로 적합하다. 반면 (지분)투자는 미래의 불확실한 현금 흐름을 담아내는 변동수익 방식이므로 성장 가능성이 높고 고위험인 프로젝트 지원용으로 적합하다. 따라서 현재 한국 경제가 미래 불확실성에 수반되는 위험의 적절한 사회적 분담을 필요로 한다면 (지분)투자 활성화를 유도하는 방향으로의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 신생·혁신 기업에 대한 지분투자, 인수합병(M&A) 자문, 인수 등의 과정에서 필요한 인수자금 제공, 구조화 금융(structured financing), 프라임 브로커리지 업무 등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 추진이 필요한 것이다.
IB에 대한 기업신용공여 한도 확대는 신생·혁신 기업에 대한 모험투자 확대라는 정책목표의 달성보다 기업에 대한 일반대출 확대로 귀결돼 은행과의 과당경쟁을 유발하고 부실대출을 초래할 수도 있다. IB의 기업 일반대출 취급이나 확대가 IB의 자본시장 업무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논리나 증거 역시 뚜렷하지 않다. 오히려 IB가 기업에 대한 신용공여를 확대할 경우 관련 신용 리스크가 투자자들에게 부당하게 전가된다는 점이 겸업주의 국가들의 경험에서 드러나고 있다.
끝으로 IB에 발행어음과 신용공여를 확대 허용하는 것은 은산분리 규제에 반하는 의미가 있다. 금산분리 규제가 대체로 완화된 IB에 은행의 고유 업무를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 정부 들어 은산분리 규제의 대안으로 금융그룹 통합감독체제 도입 논의가 대두되고 있는데 새로운 체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IB의 일반대출 한도 확대 허용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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