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초 경찰 공무원 임용을 위해 상경한 이모(23) 씨는 최근 잇따라 발생한 공시족 자살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닌듯해 불안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우울감 때문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다 보니 합격에 대한 자신감은 갈수록 떨어지고 책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스트레스로 밤잠을 못 이루는 일이 부지기수고, 울적한 기분도 수시로 느낀다. 최 씨는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얼마 전에 우울증 자가진단테스트를 해 봤다”며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와서 치료를 받으려 하는데 기록이 남아 나중에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도 된다”고 털어놨다.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을 포기하며 ‘N포 세대’라 불리는 20대의 정신건강마저 무너지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삼성서울병원의 ‘정신건강실태역학조사’에 따르면 2016년 18~29세의 우울장애 1년 유병률은 3%로 1위를 차지했다. 2위인 70대 이상의 1.5%에 비해서도 2배나 높다. 가장 건강해야 할 20대가 우울증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증가세가 위험한 수준이다. 복지부의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 19~29세 청년 중 우울 증상을 경험한 이들의 비중은 2007년 9.7%에서 2015년 14.9%로 5%포인트 이상 늘었다.
더 큰 문제는 20대 청년들의 정신건강이 정부 대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청년들이 우울증에 걸려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정신병원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진료기록이 취업 시 불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민간 심리상담센터를 찾기엔 비용 부담이 크다. 돈벌이가 없는 청년에겐 높은 문턱이다. 일부 대학에서 무료로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신청 후 상담까지 길게는 수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이상영 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기침체와 청년 실업 문제 등 사회적으로 우울감을 느낄만한 환경이 지속돼 왔다”며 “(이를 관리할)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최악의 청년실업에 늘어나는 우울 청년= 청년들 우울증 증가의 최대 원인은 높은 실업률과 취업난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07년 7.2%이던 청년 실업률은 2015년 9.3%, 지난 2월에는 12.3%까지 급등했다. 윤우석 계명대학교 교수는 자신의 논문 ‘대학생의 취업 스트레스가 우울감 및 자살 생각에 미치는 영향(2016)’에서 대학생이 갖는 우울감 중 50% 이상이 취업 스트레스와 연관돼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 동작구 산하 마음건강센터가 2014ㆍ15년 구내 공시족 120명을 대상으로 검진한 결과에서도 무려 70%가 우울증이나 자살생각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실제 취업난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년들이 급증 추세다. 지난 3월 서울 마포구 공원에서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한 공시생이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유서에는 “부모님께 죄송하다. 더는 살아갈 힘이 없다. 계속된 실패로 절망을 느낀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같은 달 전북 전주의 한 고시원에서도 같은 비극이 발생했다. 공시족인 그의 휴대폰에는 “엄마 미안해”라는 문자메시지가 발송되지도 않은 채 남겨져 있었다. 4월에는 한 공시생이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경부고속도로의 한 휴게소 화장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신과 진료기록, 취업 걸림돌 될까 두려워”= “F코드(정신 및 행동장애) 대신 Z코드(일반상담)로 적어주세요”
정신과를 찾는 청년들이 자주 하는 요청이다. F코드가 아닌 Z코드로 진료기록을 남겨달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정신질환으로 치료받은 사실이 알려져 취업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Z코드로 기록하면 상담 비용은 국민건강보험혜택이 적용되지만 약물 처방전은 의료보험이 아닌 비싼 비보험으로만 받을 수 있다. F코드로 적어야만 약물 처방전을 받을 때 의료보험이 적용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만에 하나 취업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은 피하려는 것이다.
아예 방문을 포기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대학생 차 모(25)씨는 스트레스가 극심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 했으나 입사에 걸림돌이 될까 싶어 마음을 접었다. 복수의 취업 관련 카페에서는 정신과 진료기록이 선발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묻는 게시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의료법상 개인의 진료기록을 임의로 열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공기관이나 사기업이 지원자의 정신과 치료 경험 유무를 알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사실관계가 이런데도 취준생들이 정신과 진료를 꺼리는 것은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낄 수 있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원은수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일부 젊은이들은 진료기록이 남는 것을 불편해한다”며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고 항우울제를 자기 부담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림의 떡’인 민간 상담 프로그램= 청년들이 정신과 치료를 꺼려 하고 있는 가운데 민간심리상담센터 방문도 쉽지 않다. 만만치 않은 비용 탓이다. 1회 상담(50분~1시간)에 보통 8만~10만 원 정도가 든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최소 5회는 상담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40만 원 가량이 필요한 셈이다. 가격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부르는 게 값인 경우도 많다.
청년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의료보험 혜택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심리상담은 의료행위로 인정이 안 되는 탓이다. 김수림 허그맘 심리상담센터 원장은 “비용 때문에 상담을 포기하는 이들은 20~30대가 특히 많다”며 “취업이 안 된 이들은 경제적 주도권이 없기 때문에 재방문하는 이들의 비율도 낮다”고 전했다.
일부 대학에서 운영하는 심리 상담 프로그램 역시 이용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무료인 만큼 인기가 가장 높지만 해당 대학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희대학교의 지난해 개인상담 신청자 수는 666명에 달하지만 이들은 상대하는 전임상담원은 1명에 불과하다. 요일별로 객원 상담사가 추가되지만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상담 신청 후 2~3개월 대기는 기본이다. 이화여대도 사정은 비슷하다.
오혜영 이화여대 학생상담센터 실장은 “대학상담센터 협의회에서 ‘1,500명당 상담사 1명’이라는 기준을 세웠지만 이화여대는 2만3,000명을 10명의 스탭이 담당한다”며 “상담을 신청하면 4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민제 인턴기자 summerbreez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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