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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19>김기창 '투망'] 한가로운 산촌...천렵하는 아이들...천재화가가 꿈꾼 '이상향'

청록색 산으로 화면 반 이상 채우고

산만큼이나 푸른 계곡 물·바위 담아

초여름의 산수 정취 아름답게 표현

예술적 변신 보여주는 '바보산수'

서민들의 삶·해악 꾸밈없이 화폭에

일명 ‘청록산수’로 불리는 운보 김기창의 1981년작 ‘투망’, 140x69cm 비단에 그린 수묵 채색화. /사진제공=아라리오컬렉션 ARARIO Collection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아마도 이쯤 아니겠나. 시인 정지용(1902~1950)이 대표작 ‘향수’를 통해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읊조리던, 애틋한 꿈에서 깨기 싫어 지그시 눈감게 한 그 풍경이 여기 있다. 딱 요맘때 초여름 날씨인 듯 짙푸른 녹음이 산과 논을 가른다. 운보 김기창(1913~2001)의 그 유명한 ‘청록산수’ 중 하나인 1981년작 ‘투망’이다.

화가는 가장 좋아하는 색인 청록을 중심으로 화면의 반 이상을 산으로 채우고 산 만큼이나 푸른 계곡 물과 바위를 그린 다음 한가로운 정자와 물고기를 잡으러 그물 던지는 소년들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벗은 등짝이 햇볕에 그을려 새까맣지만 정겹다.

청력 상실이라는 장애를 극복한 천재화가 김기창의 섬세하고 색 고운 ‘청록산수’와 민화풍에 투박할 정도로 과감한 붓질이 파격적인 ‘바보산수’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이 부럽지 않았다. 10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MBC 주말드라마 ‘하얀거탑’에서는 전도유망한 외과의사의 부인이 병원 부원장 부인에게 청록산수를 뇌물로 건네는 장면이 등장했고 “바보산수도 모르냐”는 대사가 오갔을 정도다. 그만큼 탐내는 사람이 많은 그림이었다는 뜻이다.

일명 ‘바보산수’로 불리는 운보 김기창 1976년작 ‘정자’, 59x49cm 비단에 수묵채색화 /사진제공=아라리오컬렉션 ARARIO Collection


서울 토박이로 태어나 와룡동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인사동에 신설된 유치원에서 신학문을 배웠던 김기창은 7살에 승동보통학교 입학식 다음날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운동회에 다녀온 후 장티푸스를 앓았고 체질상 상극인 인삼을 달여먹고 열병에 시달려 청력을 잃었다. 그는 남의 말을 들을 수 없었고 그의 말은 남이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런 김기창에게 그림은 소통의 수단이었다. 대상을 보는 눈은 예리했고 이를 표현하는 손끝은 절실했다.

열두 살에 보통학교 복학을 하고도 문맹이던 아들에게 한글과 일본어를 직접 가르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목수가 되길 바랐던 남편의 뜻과 다르게 화가로 키울 것을 결심해 이당 김은호(1892~1979)를 찾아간다. 지금으로 치면 당대 으뜸의 미술대학이라 할 만한 이당의 화숙 ‘낙청헌’에서 김기창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입문 반년 만인 1931년 열린 조선예술전람회(선전·鮮展)의 입선을 시작으로 연속 6년간 특선까지 휩쓸자 당시 신문들은 그를 장애의 역경을 딛고 일어난 용기와 재능이라 칭송하며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김기창은 운보(雲甫)라는 이름이 유명하지만 원래 아호는 어머니가 지어준 운포(雲圃)였다. 줄곧 운포로 활동하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포(圃) 자에서 테두리인 구(口)를 벗어 던지고 보(甫) 자를 써 스스로 ‘운보’라 선언했다. 이는 스승인 이당 김은호의 그늘에서 나오겠다는 의미이자 법도에 얽매인 일본식 화풍을 떨치겠다는 의지였다. 그림뿐 아니라 글솜씨도 좋았던 김기창은 그간 조선 미술의 발목을 잡은 봉건적 잔재를 떨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갈 것을 주장했으며, 자신이 매진했던 수묵 채색화이건만 시대를 외면한 폐물(廢物)이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해방 직후에는 자유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 겸 삽화가로 활동했고 국립민족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 미술부장으로도 몸담았다.

운보에게 화가의 길을 열어준 이가 자애로운 어머니였다면 그 길을 평생 같이 걸어간 사람은 삶의 반려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아내 우향 박래현(1920~1976)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부부전’을 열었던 1947년 그해, 부인은 필담을 통한 남편과의 대화방법을 극복해야겠다 결심하고 상대방의 입모양을 보고 말을 읽어내는 구화법을 운보에게 가르쳤다.



1963년에는 한국 최초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김환기가 커미셔너로 뽑혀 유영국·김영주·서세옥과 함께 김기창이 참여했다. 당시 그의 출품작은 ‘유산의 이미지’ ‘태고의 이미지’ 등 추상화들로 시대의 변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선구적 감각을 뽐냈다.

일제강점기이던 20대 시절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기창이지만 그림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앞서 조선의 풍속화 내용과 한국적 산천의 모습을 곧잘 그림에 등장시키다 1970년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을 기점으로 청록산수가 첫선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왜색풍을 걷어낸 운보가 대만 출신 화가 장다첸(張大千·1899~1983)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도 제기한다. 어쨌거나 이 그림의 인기는 엄청났다. 게다가 1979년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아이들을 돕고자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을 맡기도 한 운보가 후원금 마련에 힘을 보태고자 일부러 잘 팔리는 청록산수를 더 많이 그리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하니 뜻이 남다른 화가였음은 분명하다.

실제 경치에서 시작해 관념 속 이상향을 그려낸 청록산수가 대중적 인기였다면 미술전문가들은 외려 바보산수를 운보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오랫동안 민화(民畵)를 수집해 온 김기창은 아내와 사별한 절망의 나락에서 민화 특유의 ‘바보스러운 해학성’과 정다운 익살을 붙들고 예술적 변신에 성공했다. “나는 오랫동안 근원을 찾아 헤매다가 한국적이면서도 순수한 인간의 감정을 잘 표현해 놓은 것이 민화임을 알게 됐다”고 한 그는 “아주 훌륭한 예술인 우리의 민화에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과 해학이 꾸밈없이 담겨 있으며, 바보산수는 그런 민화의 정신을 내 나름의 작품세계에 담아보려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림의 인기로는 원없이 산 운보지만 그의 삶 곳곳에는 시대의 상흔이 감지된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운보가 처가인 전북 군산으로 피난 갈 때 두 동생은 월북을 택했다. 운보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막내 여동생 기옥 씨는 북한에서 의사가 됐다. 남동생 기만 씨는 공훈예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지난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때 기만 씨는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는 형을 찾았고, 이 극적인 만남에서 둘은 서로의 그림을 나눠 가졌다. 병상에 누운 채 그리던 동생을 만나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화가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하나 잘하는 사람은 둘도 능하고 열 일 빼어나기 마련이니 김기창은 산수뿐만 아니라 인물화에도 독보적이었다. 역사 속 위인의 증명사진을 대신하는 그림인 ‘표준영정’ 작업에 참여해 을지문덕·무열왕·문무왕 등 6명을 그렸다. 특히 그가 1973년 그린 세종대왕 인물화는 1만원권 지폐 도안에 사용돼 화가를 더 친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당시 정부가 지정한 93점의 표준영정 가운데 14점이 ‘친일 화가’의 작품이니 표준영정 지정을 철회하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그 바람에 김은호·장우성과 함께 김기창의 친일행적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급기야 지폐에서도 운보가 그린 세종대왕 인물화를 없애자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그랬다. 일제시대 때 이미 유명세를 쌓은 김기창은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비롯해 강제 징집을 부추기는 그림을 그리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했다. 스스로 일본병사를 그리던 부끄러운 과거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으나, 결국 2009년 그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과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화가를 원망할지언정 그림까지 미워할 필요 있겠나 편드는 목소리도 있지만 예술이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비춰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혀 별개로 볼 수만은 없겠다. 판단이야 각자의 몫이다. 누군가는, 꽤 많은 이들이 운보의 그림에서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를 곱씹곤 한다. 화가는 가고 없으나 여전히 남아 빛나는 그림에서 외할머니의 부채질 같은 위안과 여유를 느낀다 한들 누가 탓하랴.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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