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국빈급 예우와 환대를 받고도 문재인 대통령이 무거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논란이 불거져서다. 문 대통령뿐 아니라 장하성 정책실장과 김현철 경제보좌관까지 나서 “FTA 재협상 합의는 없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FTA 재협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대면했을 때는 재협상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공동 언론발표와 트위터를 통해서는 작심한 듯 재협상 발언을 쏟아냈다. 그야말로 ‘외곽 때리기’ 전술이다.
문 대통령은 “실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서 FTA 영향을 분석하자”고 제안했지만 미국이 재협상을 공식 요구하면 협상 개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해명을 하거나 진의 파악에 나서는 등 다소 허둥대는 모습이다. 문 대통령은 “합의 사항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고 산업통상자원부는 “대응 방침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하더라도 재협상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것 자체가 국내 경제에 적지 않은 파장과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의 방미 기간 내내 FTA 재협상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전날인 6월29일(현지시간) 정상 간 만찬 직후 트위터를 통해 “방금 아주 좋은 만남을 마쳤다”면서도 “북한, 새 무역거래(new trade deal)를 포함한 많은 주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6월30일 정상회담 공개발언에서도 “한국과 무역거래를 재논의(재협상·renegotiation)하고 있다”고 거론했다. 정상회담 이후 공동 언론발표에서도 “굉장히 심각한 자동차라든지 철강의 무역 문제에 대해서 지난밤에 이야기를 했다”며 “문 대통령께서는 이런 저의 우려 표명에 대해서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겠다고 말씀해주셨다”고 설명했다.
이에 문 대통령과 청와대 관계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청와대는 양국 실무진까지 참여해 확대 정상회담을 발표한 후 채택된 공동성명에 FTA 재협상이라는 문구가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되지 않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반박을 내놓았다. 장 실장과 김 보좌관은 이례적으로 미국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트럼프 대통령이 큰 규모의 무역적자와 특히 자동차·철강 분야에서의 무역 불균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정한 조치를 취하거나 새로운 협상을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면서도 “실제 정상회담 과정에서 FTA 재협상을 시작하자는 발언은 없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시정의 소지가 있다면, 관세 외 장벽이 문제가 된다면, 실무 TF 같은 걸 구성해서 FTA 영향을 분석하자”고 역제안했다.
결국 문 대통령은 귀국 직후 트럼프 대통령 발언의 진위부터 파악하는 작업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우선 청와대 측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국내 정치용 발언일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서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지지층을 위한 자극적인 발언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경제사절단이 5년간 128억달러의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고 투자지역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 기반인 ‘러스트벨트’가 될 것으로 전망돼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FTA 재협상까지 갈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양국 간 공식 합의를 뛰어넘은 트럼프 대통령의 FTA 재협상 발언이 향후 양국 간 군사·경제 협상 분야에서 주도권을 점하기 위한 카드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FTA 재협상을 백지화하는 대신 미국산 무기 판매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과정에서 미국 측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용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DC=민병권·박형윤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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