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성 망막질환으로 시력을 잃은 지 10년이 지난 중년 여성이 국내 첫 인공망막기기 이식수술로 시력을 되찾아가고 있다.
‘망막색소변성’ 환자인 이화정(54)씨는 20년 전 어두운 곳에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아 야맹증이겠거니 하고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망막 시세포의 기능장애로 조금씩 시력을 잃어가다 결국 실명에 이르는 망막색소변성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인구 4,000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가장 흔한 유전성 망막질환이다. 처음에는 주변부가 흐릿하게 보이고 점차 시야가 좁아지더니 갈수록 중심부 망막이 변성돼 중심 시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지난 2007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어 눈앞의 강한 빛 정도만 희미하게 구분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치료제도 없어 24시간 남편의 도움을 받아 생활해왔다.
실의에 빠져 있던 이씨에게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과 유럽인증(CE)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공망막기기인 ‘아르구스2’의 이식 기회를 잡은 것. 윤영희 서울아산병원 안과 교수팀은 지난해부터 한국망막변성협회와 망막색소변성환자협회의 협조를 받아 수술 희망자 선정 절차 등을 진행해왔다. 이씨는 망막 내 신경세포 기능평가 검사에서 수술 적합 판정을 받았다. 1인당 2억원쯤 되는 비용은 ‘서울아산병원 발전기금’ 등에서 지원했다. 이씨를 포함해 총 5명의 망막색소변성 환자가 이런 방식으로 이식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이씨는 지난달 26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시각정보 수신기와 60개의 미세전극 백금 칩으로 이뤄진 아르구스2의 내부 장치를 망막 위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아르구스2를 개발한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안과연구소의 마크 후마윤 박사와 윤 교수의 집도로 이뤄졌다.
의료진은 2주 뒤인 이달 12일 이식된 내부 장치와 안경에 부착된 외부 카메라 및 특수 휴대용 컴퓨터 기기의 전자신호를 연결했다. 시각중추에 신호가 전달돼 국내 첫 인공망막기기 이식수술에 성공했다.
이씨는 수술 후 한 달가량 지난 지금 1~2m 거리에서 시력표의 가장 위에 있는 큰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시력판의 큰 글씨를 다시 읽게 됐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차가 움직이거나 앞에 사람·문이 있는 것도 알겠더라고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씨는 앞으로 20회에 걸쳐 재활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사물이나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공간이 어떤 시각 패턴으로 뇌에 인식되는지 등을 훈련한다. 정상인이 보는 것보다 단순화된 시각 이미지를 파악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일상생활과 독립 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씨는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하니 무척 감격스럽다”며 “딸의 결혼식에 부축을 받지 않고 걸어 들어가 단상에서 화촉을 밝히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망막색소변성 환자에게 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데 의미가 있다”면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인공망막 이식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국내뿐 아니라 주변국 환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망막색소변성으로 실명 위기에 처한 환자는 국내에서만 1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아르구스2 이식수술 적합 판정을 받더라도 기기값·수술비가 2억원이나 돼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다.
아르구스2는 지금까지 미국·유럽·중동 등지의 망막색소변성 환자 230여명에게 이식됐다. 개발자인 후마윤 박사는 지난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기술혁신 메달’을 받았다. 국내의 경우 기산과학이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수입 의료기기 품목허가를 받았고 한국보건의료연구원으로부터 신의료기술 평가를 받고 있다.
/임웅재기자 jael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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