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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15> 스타트업 키우던 그녀, 교육 콘텐츠 스타트업에서 꿈을 펼치다

서숙연 해빛 대표

서숙연 해빛 대표




어린 시절부터 책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인생의 멘토였다. 어머니의 절약 정신 덕에(?) 그 흔한 전집 세트나 장난감은 구경할 수 없었고, 웬만한 옷도 사촌언니에게 물려 입었다.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고 단조로운 일상 속 가장 행복한 시간은 도서관에서 보내는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책을 읽었고 그녀의 손을 거쳤던 위인전은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도전 의식을 심어줬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여느 입시생처럼 죽도록 공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스스로 머리가 좋지 않다고 여겼기에 남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시간이다. 다행히 사교육 도움 받지 않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언어 영역보다는 수학과 과학의 성적이 좋아 기술경영학과를 선택했다. 인생의 전환기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실시한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인사조직 등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유학을 결심했고, 석사 학위를 딴 후 외국계기업 등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전문업체에 들어가 일을 배우며 스타트업 생태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미취학 아동을 위한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다가 시장성을 발견했고 스스로 창업 전선에 나섰다. 동남아시아 ‘넘버1’ 놀이 교육 콘텐츠 전문기업을 꿈꾸는 서숙연(32·사진) 해빛 대표의 이야기다.

퀴리 부인처럼 살고 있었던, 책을 좋아했던 소녀



부모님 두 분의 고향은 대구다. 기업은행에 근무했던 아버지는 친구의 소개로 4살 아래 어머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했던 어머니는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 뒀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곧잘 했던 어머니는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탓에 인문고가 아닌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 현재의 특성화고)에 진학한 게 평생 한(恨)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지 못했다는 후회 때문인지 어린 자녀들에게 항상 책을 읽혔고, 어머니 본인도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6살 때 남동생과 뭔가를 스케치북에 쓰면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의 서숙연 대표.


서 대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대구 친가는 다소 위압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결혼하자마자 시댁에 들어와 살았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둥지를 옮길 때까지 7년간 제대로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그릇을 깨는 등 활달한 큰 딸 숙연 때문에 야단을 맞는 것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친할머니는 당신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며 며느리에게 잘못을 돌렸고 어머니는 대꾸 한 마디 못하고 속으로 삭혔다. 어린 딸의 눈에도 할머니에게 항상 야단을 맞는 어머니가 불쌍하게 보였고, 서울로 이사가게 됐을 때는 해방감을 느꼈다.

6살 때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도봉구 창동, 노원구 중계동 등 강북 지역에서 자랐다. 은행에 다니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버지는 당시부터 학원에 다니면서 여러 자격증을 땄고 영어는 물론 중국어도 배웠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물론 본인도 독서를 즐겼고 자녀들이 웬만큼 성장한 후에는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를 다녀 학위도 땄고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갖고 있다.

부모가 항상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자란 서 대표 역시 집에 돌아오면 당연히 책을 집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가 가장 기다리는 날은 일요일. 매주 일요일 아침 식사만 끝내면 엄마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고전소설이나 명작동화 등 다양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지만 철이 들면서는 위인전에 손이 더 갔다고 한다. 여성 리더의 삶을 배우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계기가 됐지만 스스로 그들의 삶에 동화되면서 진취적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됐다.

어머니, 남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 서숙연 대표의 모습.


“가장 즐겨 읽은 책은 ‘퀴리부인’과 ‘신사임당’이었습니다. 각각 10번 이상은 읽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어떤 구절은 보지 않고도 외울 정도였죠. 제가 대구에서 태어나서 다소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탓인지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멋지게 살아가는 모습에 놀랐고,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역시 큰 딸인 제가 누구보다 멋지고 진취적으로 살아가길 바라셔서 그런 책을 위주로 골라주셨어요.”

사교육 도움 없이 대학에 진학하다



독서를 좋아하는 것을 빼고는 또래 아이들과 비슷했다. 대구에서 6년을 자랐던 만큼 강한 억양의 사투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고, 경상도 사투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말다툼도 했다. 화끈한 성격에다 리더십 덕분인지 친구들 사이에선 인기도 많아 초등학교 내내 반장, 부반장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어머니는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선 한 가지에 집중하면 된다고 믿었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히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영어나 수학학원도 보내지 않고 학습지만 매주 고정적으로 받아 직접 자녀들을 가르쳤다. 서 대표의 기억에 어머니는 가장 엄한 선생님이었다. 하나라도 틀리면 호되게 야단을 맞았고, 100점을 받으면 칭찬 세례가 쏟아졌다.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엄마의 칭찬을 듣겠다는 그 목적 하나로 공부에 집중했던 것이요. 하나도 실수하지 않고 만점을 받으면 엄마가 너무 많은 칭찬을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조금이라도 남에게 트집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 남보다 뒤처지지 않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서 승부욕이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엄마표 학습지로 그럭저럭 초등학교 생활을 마쳤지만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ABC 알파벳을 깨치지 않고 중학교 진학한 학생은 반에서 서 대표가 유일했던 것이다. 혹여 뒤처질까 두려움이 밀려왔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모범생으로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담임선생님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서숙연 대표의 모습.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는 반 등수, 전교 등수가 나오잖아요. 그 등수에 엄청나게 신경을 썼어요. 열심히 하는 만큼 등수가 올라가는 재미도 나름 있었구요. 불암중학교에 다녔는데 나름 강북에선 사교육으론 알아주는 중계동에서 살았는데도 학원을 안 다녔으니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 고집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주변에 아줌마들이 학원 정보 주고 받는 것도 들었을 텐데 꿈쩍도 안 했으니까요.”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 때문인지 점차 성적이 올랐고 중학교 졸업할 즈음엔 전교 10위권에 들었다. 서울외국어고등학교에도 무난히 입학했다. 전교 상위권에 있던 학생들이 한 곳에 모였으니 경쟁은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잘난 친구들 사이에서 해낼 수 있을까 불안감은 컸지만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파고 들었다. 입시 스트레스 탓인지, 아니면 게임의 매력을 뒤늦게 알게 되서인지 스타크래프트에 푹 빠졌다. 해야 할 분량만큼 공부를 마치면 곧바로 스타크래프트를 하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시작한 스타크래프트를 사회 생활을 할 때까지도 즐겼으니까 독서 외에 취미가 없던 제가 유일한 취미였던 거죠. 공부에 따른 스트레스가 심해질수록 게임에도 몰입해서 고2~3때는 스타크래프트가 없이 살 수 없었죠. 그럼에도 시간 배분을 잘 해서 공부 목표 시간 5시간을 마치면 1시간의 게임 시간을 저에게 보상처럼 주곤 했지요. 아무리 수험생이라도 하루 종일 공부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현재 하고 있는 공부 분량을 잘 마치면 뭔가 내가 좋아할 만한 보상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마라톤 같은 입시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구요.”

고등학교 시절에도 성적은 점차 올라 졸업할 즈음엔 전교 10위권에 들었다. 고2 때 선도부 활동을 하면서 (학생을) 관리?감독을 하는 게 적성이 맞는 생각에 경찰대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키가 가장 큰 문제였다. 경찰대 지원 자격 기준이 158㎝인데, 서 대표의 당시 키는 156㎝였던 것, 지금도 157㎝ 정도라며 웃는다. 전공을 고민하던 그는 ICU(한국정보통신대학) 기술경영학과 03학번으로 입학했다. 1998년 설립된 ICU는 정보통신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KT 등 국내 IT 업체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사립대학교로, 다른 대학과 달리 3년 졸업을 위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으며 학생 전원을 장학생으로 선발해 학비를 면제해줬다. 과학고와 외국어고 등 특목고에서 대부분의 학생을 선발했으며 수능 1등급 이상 학생들이 주로 들어갔다. 그러나 2009년 카이스트와 통합되며 현재 KAIST 문지캠퍼스로 남아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시험 직전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하는 모습. /사진제공=서숙연 대표


“고대 영문과와 ICU 두 곳에 합격했는데, 제가 문과였지만 공대 성향이 강해서 ICU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특히 ICU는 대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거라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도 좋았던 것 같아요.”(웃음)

인턴 시기, 삶의 전환기를 맞이하다

자유로운 생활에 매력을 느껴 ICU를 선택했지만 공대 분위기가 강한 데다 학교 주변에 변변한 문화 공간이 없어 다들 공부만 했다고 한다. 남학생이 70~80%에 달해 그나마 유일한 놀이 문화는 저녁 술자리 정도였다. 주량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서 대표는 “소주 한 병 정도는 거뜬히 먹는다”고 답했다.

“제가 생각보다 술이 세더라구요. 하루 종일 수업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저녁 무렵 과 친구들이 하나 둘씩 술집에 모여 술을 마셨지요. 대학 2학년 때인가 소주 2병을 마시고 완전히 취해서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는데 엄마 아빠가 오신 거에요. 그날 온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까맣게 잊고 실컷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잤던 거죠. 물론 두분 모두 놀라셨지만 별 말 안 하시고 서울로 올라가셨구요. 그런데 2학년 말이 되니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공부만 하니까 학점은 좋았지만 동아리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대전에만 있었으니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학생일 뿐이죠.”

대학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뭘 할 수 있을지 탐색했다. 그의 눈에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인턴 프로그램 ‘썬스타’가 들어왔다. ‘썬스타’는 노동부와 한국썬이 함께 진행하는 대학(원)생 연수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에게 외국계 IT 기업에서 1대1 멘토링을 통해 다양한 업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연수생은 6개월 동안 실제 업무 패턴과 같은 일을 하게 되며 업무 처리, 수행 능력, 핵심 역량 등을 향상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업무역량을 키운다. 매력적인 프로그램에 반한 서 대표는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했고, 2005년 7월부터 6개월간 인턴 생활을 했다.

서숙연 대표가 남편과 딸 채민이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제 전공이 기술경영학과이기 때문이지 고객사 커뮤니케이션 등 CS(customer satisfaction·고객 만족) 업무를 담당했어요. 기술 고객은 일반 고객과 달라 대응 방식도 전문적이고 섬세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CS와 마케팅을 연계한 업무가 제 적성에 맞고 무척 재미 있더군요. 인턴십 정원이 30명이었는데, 다양한 전공의 다양한 학교의 친구들을 골고루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고대 친구는 응원단 출신인데 인턴기간 응원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고 카이스트 출신은 컴퓨터 ‘덕후’였고 성신여대 친구들은 ICU 친구들과 다른 친근한 매력이 있었구요. 세상이 정말 다양하구나 감탄하는 한편 세상살이 속으로 들어가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죠. 물론 또래 여학생처럼 남자 친구도 사귀고 싶었구요. 저의 첫 사회 생활이었는데 돌이켜보면 썬스타 프로그램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 같아요.”(웃음)

인턴 동기 중에 포스텍 친구가 그녀에게 괜찮은 녀석이라며 학교 동기를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평범한 만남보다는 다른 만남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소개팅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선물로 받은 에버랜드 무료 이용권 4장이 있어서 주선자인 친구 커플이랑 저의 소개팅남이랑 다 같이 놀러 가자고 제안했어요. 당시 집이 성내동에 있어서 천호역에서 만나기로 했죠. 에버랜드까지 곧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거든요. 아침 일찍 천호역 앞에서 만나 저녁에 헤어질 때까지 하루 종일 같이 있었어요. 좀 못 생겼는데 얘기가 너무 통하더군요. 제가 스트크래프트 광팬이라는 데도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갔구요. 보통 남자애들은 여자애가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한다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곤 하거든요. 그렇게 말이 잘 통해서 편하게 만나기 시작했는데 바로 지금의 제 남편이랍니다.”

포스텍 수학과 전공이었던 서 대표의 남편은 맥쿼리에 다니다 홍콩계 시스템 트레이딩 전문업체로 옮겼다고 한다. 전공을 살려 금융 파생상품을 만드는 일을 주로 하고 있으며 홍콩 회사로 옮긴 후 지난 3년간은 한 달에 한 번 보면서 그리움을 달랜다고 한다.

HR의 매력에 빠져 컨설턴트의 길로 나서다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서 대표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인턴 활동을 하면서 CS와 마케팅을 맡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간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생겼고, HR(human resources?인사관리)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다. 런던대 인사조직학과 석사 과정을 밟던 그녀는 석사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중 남자친구(지금의 남편)가 병역특례로 근무하던 IT기반 스타트업에서 석사연구원으로 지내기로 했다. 회사 대표의 허락을 구해 1달 동안 회사에 출근해 하루 종일 직원들의 근무 형태를 관찰하고 회의를 참관하고 개별 직원을 인터뷰하면서 논문을 완성했다. 논문 주제는 ‘개발자 중심 IT 중소기업의 성과 관리’였다.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린 스타트업의 열정과 패기는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직원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회사였지만 성과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구성원 모두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당시 받은 깊은 인상은 나중에 스타트업계로 이직할 때도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죠.”

HR컨설턴트였던 사회초년생 시절의 서숙연 대표의 모습.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2008년 10월 IBM코리아 컨설턴트로 입사했다. HR 분야의 막내 컨설턴트로 들어간 만큼 선배들과 팀을 이뤄 일을 했다. 삼성, LG, SK, 대한항공 등 대기업이 맡긴 HR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현업 부서 조직원들의 대면 인터뷰를 주로 맡았다. 그녀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세부 실행 사항을 정리하면 팀장이 해당 기업의 HR 전략을 구성해 보고서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내로라 하는 기업의 조직 문화를 직접 맞닥뜨리면서 그녀는 “나는 절대로 이런 대기업에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일류 회사인데도 조직 문화는 후진적이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 IBM코리아에서 HR 전략을 제안해도 대부분은 수용되지 않고 그냥 종이뭉치로 버려지는 느낌이었다.

“밤을 새서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해도 결과적으로 실행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게 됐죠. 그런 일을 겪으면서 대기업 문화는 저한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막내 컨설턴트로 내가 할 수 있는 운신의 폭도 매우 좁다는 것도 한계로 느껴졌어요. 하지만 조직 내 각 부서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문제점을 발견하고 실행 방향을 제시하는 일련의 업무는 즐거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던 시점에 공기업인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선임컨설턴트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IBM코리아를 2009년 10월에 나와 12월 생산성본부로 옮겼고 생산성본부에서 2년간 근무했다. 선임컨설턴트로 들어간 만큼 자유롭게 의견도 펼치고 능력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산업부 산하 공기업이라는 특수성을 몰랐던 접근법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수직 체계가 강한 조직 특성상 선임컨설턴트라고 해도 운신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었고, 종종 센터장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글로벌 트렌드에 맞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견을 제안하곤 했지만 애당초 그런 제안 자체가 쉽지 않은 조직이었다. 그럼에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2년을 버텼고, 재직 중이던 2011년 6월 결혼식도 올렸다.

스타트업 세계로 들어오다



무미건조한 직장 생활에 지쳐갈 즈음 그녀에게 새로운 제안이 왔다.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전문기업인 패스트트랙아시아가 설립 준비를 하면서 HR 전문가를 찾았던 것. 포스텍 출신인 남편을 통해 박지웅 창업자가 러브콜을 했고, 2012년 1월부터 스타트업계에 발을 담그게 됐다. 패스트트랙아시아는 ‘티켓몬스터 3,000억 빅딜’의 주역인 박지웅 대표(당시 스톤브릿지캐피털 투자팀장)과 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 노정석 파이브락스 대표, 미국 인사이트 벤처스 등이 ‘한국판 버크셔 해서웨이’를 꿈꾸며 패스트트랙아시아를 공동 창업했다. 일종의 ‘컴퍼니 빌더’로 새로운 사업 모델을 발굴하고 이를 운영할 전문경영인(CEO)까지 선발한 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설립 초기부터 패스트트랙아시아는 투자 심사인력보다 재무·사업개발·홍보·해외진출 등 투자한 회사를 육성하고 관리하는 인력이 훨씬 더 많았고, 서 대표 역시 HR 전반을 맡는 조건으로 합류했다.

서 대표는 “패스트트랙아시아는 온라인 플랫폼 기술과 오프라인 서비스 인프라를 결합해 헬로네이처(유기농 식품 배송), 푸드플라이(고급 음식배달), 스트라입스(남성 맞춤의류), 패스트캠퍼스(성인 재교육), 패스트파이브(사무실 임대)를 잇따라 세웠고 이 중에는 헬로네이처처럼 성공한 스타트업들도 다수 나왔다”며 “신생 회사의 경우 인력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가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만큼 적합한 인재를 매칭해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소개했다.

서 대표의 석사 논문 주제이기도 했던 만큼 애정을 갖고 일을 추진했고, 신생 조직인 만큼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도 만족스러웠다.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채택되는 탄력적인 조직 문화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지체 없이 실행됐고, 실행에 따른 결과물이 눈에 보였던 만큼 수정 및 폐기도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HR 분야의 리더로 들어갔던 만큼 의미 있는 수준의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고, 내 아이디어가 어떻게 적용되고 진화되는 지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도 짜릿했어요. 그때는 밤 11시까지 야근을 해도 지겹지 않은 경험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이전 직장에서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어차피 반영도 안 되는데 내가 뭘 하고 있나’하는 회의감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게 고된 업무조차 즐겁게 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던 게 사실이구요.”

2013년 딸아이인 채민이를 출산하고 산후 조리를 하던 중에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임지훈 전 케이큐브벤처스 대표(현 카카오 대표)가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것.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행하고 크고 작은 컨퍼런스를 기획했던 그녀의 열정을 높이 산 임 대표가 조심스럽게 러브콜을 보냈고, 새로운 일에 매력을 느낀 서 대표는 출산 2개월 만에 합류하게 된다.

“패스트트랙아시아에서 많이 배웠고, 즐겁게 일했지만 스타트업에 보다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는곳으로 옮기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스타트업 지주회사 성격상 아무래도 지원 기업의 지분을 어느 정도 확보하는 데 저는 그것보다는 스타트업 육성에 초점을 맞춘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서숙연 대표가 딸 채민이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모습.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업무를 시작한 만큼 남모를 고충도 있었다. 배가 안 꺼진 것은 것은 젖도 계속 돌아 6개월 동안 유축기를 갖고 다니면서 버텼다고 한다. 하지만 집에서 애기와 하루 종일 있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게 훨씬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케이큐브벤처스는 왓차, 키즈노트, 두나무, 빙글 등 다양한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면서 업계의 큰 손으로 떠올랐고, 서 대표도 다양한 업무를 할 수 있었다. 몇 년간 스타트업 지원 업무를 하던 서 대표는 나만의 콘텐츠를 갖고 사업을 하고 싶은 욕구가 조금씩 커져갔다. 그러던 중 빙글의 문지원 대표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고, 새롭게 떠오르는 플랫폼에서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고 합류했다. 그때가 2014년 7월이었다.

교육 콘텐츠, 운명처럼 다가오다



빙글(vingle)은 관심사를 기반으로 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등이 지인들과 친구를 맺고 그들이 공유한 콘텐츠를 자신의 피드에서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이라면 빙글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를 등록하면 해당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이 자신의 피드에 보여지는 방식이다.

그녀가 합류할 당시 빙글은 10~20대 중심의 사용자에서 연령대를 넓히는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문 대표 자신이 40세였던 데다 서 대표도 아이를 낳은 엄마라는 공통점을 무기로 ‘엄마 고객’을 타깃으로 마케팅을 펼치기로 했다.

“저 자신도 엄마로서 삶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엄마들의 생각이나 생활 패턴을 알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우선 웬만한 맘카페는 다 가입하고 죽순이처럼 상주했죠. 어떤 얘기들이 오가고, 어떤 고민을 털어 놓고, 어떤 제품을 선호하는지 등등 계속 관찰했어요. 그래서 그때그때 엄마들 사이에 화제가 된 토픽을 선정해서 빙글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예컨대 아이 배변이 주제로 오르면 관련 내용을 육아 전문서적이나 인터넷에서 찾아 읽기 쉽게 구성해서 올리는 방식으로요. 그렇게 올린 콘텐츠가 바이럴(viral?입소문)이 정말 잘 되더군요. 엄마 콘텐츠를 올리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가입자 중에 엄마가 몇 만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제가 회사를 나올 때는 20만~30만까지 늘었어요. 밤낮없이 엄마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콘텐츠를 구성해서 올리니까 회사에서는 파트 타이머로 교육 전공자를 고용해줬고, 이 분이 나중에 저희 창업 멤버가 됐죠.”

서 대표가 빙글에서 엄마 타깃 마케팅을 하면서 느낀 점은 육아 콘텐츠에 니즈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콘텐츠 자체가 적은 것도 아니고 찾아 보면 어디서나 있는 게 육아 정보였지만, 아이의 연령에 맞는 맞춤형 콘텐츠를 찾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서 대표가 창업의 키 포인트로 잡은 지점이다.

“엄마들이 맘카페에 몰려 있는데 정작 신뢰성이 있는 모바일 콘텐츠는 부족한 게 현실이었습니다. 예컨대 자녀의 배변 훈육을 할 경우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엉덩이를 때려도 된다’는 엉터리 답변이 올라오기도 할 정도였죠. 생각보다 엄마들의 궁금증은 많은데, 믿을 만한 콘텐츠는 부족하다고 판단됐고 그런 미스매칭을 해결하는 서비스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 양질의 콘텐츠가 세상에 없는 게 아니라 육아서적 등 기존에 있었던 좋은 콘텐츠를 이용자에 맞게 제공하면 되는 거였구요. 5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한테 0세 갓난 아기 정보를 주는 것은 오히려 ‘노이즈(noise·소음)’나 마찬가지거든요. 아이가 0세부터 7세까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면서 엄마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도 달라지는 데 자녀의 성장 주기에 맞는 정보를 주는 서비스는 없었으니까요. 생년월일을 기반으로 정보를 맞춤형으로 제공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회사를 나왔죠.”

아이들을 위한 교육 서비스 ‘해빛’, 드디어 빛을 보다



2015년 7월 회사를 나와 9월 교육 콘텐츠 전문기업 ‘해빛’을 설립했다. 해빛은 ‘해처럼 빛나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 서비스’란 의미와 함께 습관(Habit)의 영어 발음을 차용해 어릴 적부터 부모와 놀면서 애착과 자존감을 형성하는 습관을 길러준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2015년 11월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둥지를 틀고 서비스 개발에 나선 경기창조혁신센터에서 ‘차이의 놀이’를 설명하며 활짝 웃고 있는 서숙연 대표의 모습.


서 대표는 빙글에서 근무하는 중에 핵심 창업 멤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빙글에서 일하던 개발자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라 교육 서비스에 관심을 보인 것. 또 파트타이머로 일하는 교육 전공자와도 친해지면서 초기 멤버로 합류시킬 수 있었다.

“창업을 결심한 후 회사 나오기 한 달 전에 핵심 멤버는 다 만났습니다. 모두 교육 서비스의 성장 가능성을 확신했고, 우리끼리 호흡을 맞추면 뭔가 이룰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죠. 물론 스타트업인튜베이팅을 하는 업무를 해왔던 만큼 스타트업 창업이 얼마나 힘들고, 망하기도 얼마나 쉬운지 잘 알고 있었어요. 10곳에 투자하면 그 중 2~3곳은 망하고, 4곳은 이도 저도 아니고,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곳은 한 두 곳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꼭 하고 싶은 서비스가 명확하게 있었던 만큼 한 번 해보자는 도전정신이 크게 작용했죠.”

서 대표는 유학 시절 HR을 주제로 논문을 썼고 직장에서도 관련 업무를 해왔기에 영유아 교육 서비스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는 “HR은 성인도 계속 성장한다는 전제를 갖고 인사관리에 임한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엄마도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아이가 한 살, 두 살 커가는 동안 성장하고 이런 성장주기에 맞춰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게 해빛의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해빛은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가 아닌 부모를 위한 콘텐츠를 지향한다. 집에서, 식당에서 아이들이 정신을 빼놓고 몰입하는 게임 콘텐츠가 아니라 부모가 온 몸으로 자녀들과 소통하면서 함께 뭔가를 만들도록 안내하는 콘텐츠에 집중한다.

교육 서비스 애플리케이션 ‘차이의 놀이’는 이런 해빛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았다. 처음 가입할 때아이의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아이의 나이에 따라 성장 발달에 도움을 주는 놀이를 쉽게 찾고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모든 놀이는 교육학에 근거해 짜임새 있게 만들어져 초보 부모도 안심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연령별?영역별 교육 패키지를 출시하고 있는데, 엄마 아빠 활용법, 아이와 함께 노는 상세한 방법 등을 모바일 콘텐츠로 제공한다. 종이 접기나 색칠 놀이 등의 놀이 학습의 경우 실제 필요한 도구를 일일이 구입하는 게 번거롭다는 데 착안해 해당 교재와 놀이 교구를 패키지로 판매하고 있다. 특히 상당수 콘텐츠는 패키지를 구입하지 않고도 스타킹이나 냄비 뚜껑 등 일상 속 다양한 도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시장 전망은 밝은 편이다. 2014년 기준 영유아 교육 시장은 3조2,289억원으로 전년 대비 22%나 증가했는데, 전체 사교육 시장 중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서 대표는 “해빛은 육아 관련 도서에 지지 않을 수준의 콘텐츠를 확보하되, 모든 콘텐츠를 모바일에서 쉽게 소비할 수 있게 제작하고 있다”며 “출퇴근 시간에 스마트폰으로 쉽게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 바로 아이와 즐길 수 있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2016년 초 ‘차이의 놀이’ 오프라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제공=해빛


실제 채민이가 출생 2개월이 되자마자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직장에 복귀한 서 대표 역시 아이와 놀아주는 게 서툰 초보 엄마였다. 아이가 이유 없이 울고 떼를 쓰면 자신도 모르게 소리도 질렀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서 대표 스스로도 ‘차이의 놀이’를 이용하면서 채민이의 눈을 맞추며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다양한 놀이법에 채민이가 흥미를 보이면서 육아가 고통이 아닌 행복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일에는 거의 자정이 가까워서야 들어가 아이의 잠든 얼굴만 보거든요. 그래서 토요일에는 1~2시간, 일요일에는 2~3시간은 무조건 아이와 함께 놀기로 했어요. 아직은 창업 초기라 주말에도 출근해서 현재 친정에 들어가 살고 있거든요. 육아 전집 같은 것도 안 사주고, 육아 교구에 돈도 거의 안 쓰지만 ‘차이와 놀이’만으로 충분히 저도, 아이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런 만족감을 다른 엄마아빠들과도 공유해야죠. 그리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바쁜 엄마아빠도 좋은 엄마아빠가 될 수 있다는 것을요. 좋은 부모의 조건이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도요.”

‘차이의 놀이’ 베타 버전이 나온 지난해 3월에는 놀이법을 나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9월부터 지금의 형태로 정식 버전이 나오면서 가입자 수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 전체 이용자 수는 8만명, 한 달에 한 번 이상 들어오는 활성 사용자는 5만명, 1일 활성 사용자는 1만 5,000명에 달한다. 이 중에서도 초보 엄마들이 애용하는데, 산후조리원 엄마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현재 만 1세 엄마가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해빛은 올해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영유아 시장이 큰 인도네시아에 진출하는 것. 단적으로 국내 신생아 수는 43만명 선이지만 인도네시아는 500만명에 달한다. 한국의 10배 이상의 시장이라는 얘기다. 이에 한국어에 능통한 인도네시아 직원을 고용, ‘차이의 놀이’ 콘텐츠를 현지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인도네시아는 시장성은 높은 데 반해 중국보다는 진입 장벽이 낮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페이스북으로 유저를 모으면서 애플리케이션을 알리는 전략을 구사할 예정이에요. 오는 8~9월께 정식 애플리케이션이 오픈한 후 회원이 일정 규모 이상 확보되면 유료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구요.”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나서면 올해 매출은 5억원, 해외 성과가 가시화되는 내년에는 30억원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지사 설립을 통해 현지화 서비스를 안착시킨 후에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영유아 시장이 큰 국가로 진출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동남아 ‘넘버1’ 놀이교육 콘텐츠 전문기업으로 우뚝 선다는 게 서 대표의 포부다.

스타트업 지원 업무를 하다가 스타트업계의 역동성에 반해 창업 시장에 뛰어든 서 대표. 그녀에게 창업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창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그런 목표보다는 망하더라도 이걸 하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 사업을 시작하세요. 아무리 잘 준비해서 시작해도 스타트업이 망할 요인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세요. 내 모든 에너지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을 다 끌어 모았는데도 망할 수 있거든요.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해요. 저 개인적으로는 ‘차이의 놀이’를 통해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됐고, 저희 서비스가 다른 엄마아빠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데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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