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홈 스타일링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안방의 가구 위치를 바꾸고 커튼을 새로 달았고, 친구 집에서도 방을 제 맘에 들게 꾸며주고 무척 즐거워했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대학에 들어갔고, 평생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싶었다. 패브릭 전문기업 디자인팀에 들어가 월급 70만원을 받으며 잡무를 도맡아 했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디자인 업무는 못했다. 견디다 못해 다른 패브릭기업으로 옮겼다. 디자이너로 입사했지만 백화점 영업부터 판촉 행사 진행, 공장 섭외와 원단 관리 등 회사의 모든 업무가 그의 손을 거쳐 진행됐다. 매일 새벽 2~3시에 들어왔고, 그마저도 밀린 일을 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성과를 내면서 보람은 컸지만, 어느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직장을 세 번 옮기면서 홈 인테리어 디자인만큼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27세에 사표를 냈다. 창업 11년차에 접어드는 올해 매출 330억원을 내다보는 홈인테리어 전문기업으로 성장 중이다. 정미현(38·사진) 데코뷰 대표의 어제와 오늘이다.
아버지의 고집스러운 DNA 물려 받다
아버지는 사업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열정적인 분이었다. 장녀인 정 대표 밑으로 한 살 아래 여동생과 다섯 살 아래 남동생이 있었지만, 가장 아버지를 닮은 자식은 정 대표였다. 앰프나 스피커 등 음향기기 제조 및 유통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주말이 없을 정도로 일에 몰입했고, 그나마 하루 쉬는 일요일에는 온종일 밀린 잠을 잤다. 그래서인지 정 대표는 제대로 된 가족 여행을 다닌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한다.
“일이라는 건 내가 미쳐야 한다. 즐거워야 한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는 영락없는 ‘워커홀릭’이었고, 그러한 자신의 열정을 자녀들이 이어받기를 원했다.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불만이 컸다. 그래서 두 딸에게 너희는 사업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고, 사업하는 남자와도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업이라는 게 워낙 기복이 심한데다 가족에게 충실하지도 못하잖아요. 사업가의 부인으로 살면서 어머니는 항상 불안해 하셨고, 그러한 삶을 자식들에게는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게다가 공대 출신으로 사업적인 감각보다는 개발자 성향이 강했던 아버지는 동료의 배신도 많이 겪었고 납품하고도 돈을 자주 떼이면서 손해를 많이 보셨어요. 저희 집이 가장 편했을 때가 국제통화기금(IMF) 직전에 친한 분과 동업하면서 아버지가 개발만 맡았을 때였습니다. 그땐 그냥 월급만 받아오셨으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안정적으로 살림을 꾸릴 수 있었죠. 하지만 그런 안정적인 생활도 몇 년 못 갔고,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쯤엔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졌어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정 대표는 하나에 꽂히면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특히 어릴 적부터 재능을 보였던 그림만큼은 누구보다 잘 한다고 자신했던 만큼 그림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원하는 수준으로 나오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어요. 미술대회를 앞둔 초등 3학년 때에는 부문별 상 3개를 모두 타기 위해 밤새 그림에 매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국어나 수학 등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미술만큼은 내가 어느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린 나이에도 강했던 것 같아요.”
남다른 재능이 있었지만 미술에만 올인하는 큰 딸이 못마땅했던 어머니는 전문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미대에 들어가고 싶다며 입시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을 때도 어머니의 극렬한 반대에 부닥쳤다고 한다.
“목표한 것만큼 상을 못 받거나 그림이 잘 안 그려지면 스트레스를 받으며 울곤 했는데 그런 저를 보면서 엄마는 무척 속상해하셨어요. 아버지의 집요한 면을 물려 받은 게 싫었던 거죠.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는 그렇게 해야 뭐라도 이룬다며, 될 때까지 하라고 부추기는 편이셨구요. 두 분의 교육 방식이 많이 다르다 보니 크고 작은 다툼도 있었구요.”
미술, 그 중에서도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다는 결심을 한 정 대표는 어머니와 전면전을 펼쳤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딸과 그런 딸을 꺾으려는 어머니가 부딪히면서 집안 분위기 역시 악화됐다. 어머니가 끝내 허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 대표는 가출을 결심했다. 어머니한테 선전포고를 하고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어머니한테 붙잡혀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집을 나가서도 갈 데가 없어서 아파트 단지를 배회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홧김에 가출했던 만큼 돈도 충분하지 않았고, 멀리 가는 건 겁이 나서 일산의 아파트 단지 안에 놀이터나 편의점 등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저를 찾아 나선 어머니한테 붙잡혔지요.”
집밖에 모르던 고지식한 딸의 가출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결국 미대 진학을 허락했고, 이튿날 입시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다. 상명대 공예학과로 진학한 그는 세부 전공으로 섬유공예를 선택하며 자신의 인생에 더욱 깊이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사업가적 자질
정 대표의 예술가적 자질은 어릴 적부터 눈에 띄었다고 한다. 언니를 도와 데코뷰 총괄운영을 맡고 있는 정주현 실장의 기억 속에서 언니는 항상 정리를 하는 학생이었다. 두 자매가 함께 사용하는 방의 정리정돈은 항상 언니의 몫이었고, 지점토로 필통이나 꽃병, 액자를 만들어 예쁘게 꾸미는 것도 항상 언니 담당이었다고 한다.
정 실장은 “고등학교 때인가 집에 오니까 난리가 났던 거에요. 언니가 안방과 거실의 가구 위치를 다 바꿔 놓은 거죠.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건 그때 언니 몸무게가 40킬로도 채 안 되는 깡마른 체구였거든요. 그런 체구로 어떻게 저 가구들을 옮겼을까 하는 생각에 다들 놀랐었죠.”
정 대표는 예술가적 기질에다 사업가적 기질도 갖고 있었던 특별한 소녀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다양한 아이템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50여장을 만들어 반 친구들에게 100~300원을 받고 팔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이미지를 카드로 만들어 그 중에서 A급은 가장 비싼 300원에 팔고 그 다음 등급은 200원, 100원, 그리고 팔기에 완성도가 현격하게 떨어지는 카드는 친구들에게 그냥 나눠주기도 했다. 돈을 벌어 어디에 썼냐는 질문에 “떡볶이를 사먹거나 인형놀이를 샀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중고등학교 때는 집안 형편이 꽤 좋았을 시절이라 어머니가 종종 백화점에 데려가 브랜드 옷을 사줬다고 한다. 캘빈클라인 등 외산 브랜드를 구매하더라도 안목이 남달랐던지 남들이 어디서 샀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중고등학교 시절 입었던 옷 중에 팔릴 만한 것들을 골라 옥션 중고장터에 올렸다. 그녀의 안목 덕분인지 꽤 괜찮은 가격에 팔았고, 돈을 벌면 고급 화장품이나 백화점 의류 등 갖고 싶었던 것을 사 입었다.
일당백의 업무를 도맡으며 성장하다
졸업 후 2003년 커튼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에 입사하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홈쇼핑 납품 커튼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이었다. 디자인팀 수습 사원으로 입사했지만 정작 디자인 업무를 맡지 못했다. 오전 5시까지 당일 방송이 예정된 홈쇼핑 방송국으로 출근, 커튼을 다림질하고 카메라 화면 잘 받을 위치에 디스플레이하고 상품 설명서 작성하는 등의 업무를 했다. 회사에 돌아와서도 디자인팀장이 지시하는 갖가지 잡무를 도맡아 했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지났지만 그의 업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옆 부서 동기가 정직원으로 전환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지만 그녀에게 언제 정직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회사 선배는 없었다. 다림질을 꼼꼼하게 못했다고 혼이 났고, 상품설명서가 엉성하다고 핀잔을 들었다. 하루 12시간 이상씩 잡무를 하면서 받았던 월급은 70만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주일에 유일하게 쉴 수 있었던 일요일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나가 시장 조사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신제품 디자인을 했다. 정성껏 디자인한 시안을 디자인팀장에게 보여줘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팀장은 그녀가 그냥 다림질 잘하고 심부름이나 하길 바랬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업무를 하려고 디자인팀에 입사한 건 아니었다. 6개월을 버티던 그녀는 더 이상 여기서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표를 냈다. 회사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사표를 수리했다. 첫 직장과의 인연은 그렇게 덧없이 끝이 났다.
그 해 말 패브릭 전문기업에 들어갔다. 유명 백화점에 식탁보나 앞치마 등 리빙 제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이었다. 첫 출근 날 그는 회사 지하에 원단 재고가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신이 났다. 재고 원단을 사용해도 된다는 사장의 허락을 받고 그는 곧바로 디자인에 들어갔다. 방석, 쿠션, 앞치마 등 그녀의 머릿속에서 상상해낸 다양한 디자인이 완제품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사원이 만든 제품인 만큼 공장에서는 최소 수량만 만들었다. 하지만 백화점에서 먼저 알아보고 추가 납품을 요구하자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디자인팀에 소속돼 있었지만 백화점 매장 측과 소통하는 일도 어느덧 그녀의 업무가 됐고, 백화점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것도 결국 그녀에게 할당됐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가 있었어요. 제 머릿속에서 디자인한 시안들이 샘플로 나오고, 회의를 거쳐 완제품으로 생산돼 백화점 매장에 진열되는 걸 보면서 희열을 느꼈죠. 하지만 마치 블랙홀처럼 일을 하면 할수록 욕심이 났고, 제 고유 업무를 벗어나 제품의 모든 단계에 관심을 갖고 손을 대게 되더라구요. 아마도 중견기업만 됐어도 저처럼 어린 사원한테 그런 업무를 주진 않았겠지만 이 회사에서는 제가 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해보라고 떠미는 분위기였어요. 어느 순간 제가 원단롤을 가득 실은 트럭을 끌고 공장으로 향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공장에서는 원단을 달라고 했는데 그걸 운반할 직원이 자리에 없어서 제가 동대문에서 원단롤을 건네 받아 트럭에 실어 일산에 있는 공장으로 갔던 거죠. 제 면허가 2종 오토였는데 어떻게 트럭을 운전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공장 사람들과 디자인 시안을 갖고 이렇게 재단하고 봉제하라고 오더를 넣고 샘플이 나오면 백화점 매장 담당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판촉 행사를 기획하고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까지 제가 맡게 된 거죠.”
날이 갈수록 일은 늘었고 지하철로 이동하면서도 작업 지시서를 작성했다. 새벽 2시 넘어 집에 돌아와서도 컴퓨터를 켜 놓고 일을 했다. 당연히 몸은 축났고, 조금씩 조금씩 지쳐갔다. 하지만 그녀의 월급은 120만~130만원 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제부터인가 대표가 그녀에게 회사의 모든 업무를 상의했고 그녀가 해결책을 갖고 오면 만족했고, 다시 다른 업무를 맡기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는 겨우 3년차인데 회사에서 어떤 게 잘 안 되고 있는지, 고객사와 어떤 문제로 힘들다든지, 모 부서 직원이 어떤 문제가 있다든지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저랑 상의하는 거에요. 사장님이 그렇게 힘들어 하시면 저는 안타까운 마음에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싶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제가 그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거죠. 저 혼자 미친 듯이 일하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일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너무 막막했어요.”
두 번째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경쟁사에서 러브콜이 끊임 없이 들어왔다. 디자인 솜씨가 좋은 데다 어떤 업무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완벽하게 진행되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직의 기준을 디자인에 전념할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2005년 가구 품목을 메인으로 하는 인테리어 전문기업에 들어갔다. 패브릭 담당자가 없었던 만큼 그녀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특화해 디자인을 할 수 있었다. 하루 평균 디자인 시안만 10개가 나왔고, 원가와 판매가를 함께 고려해 상품화했다. 이 회사 대표 역시 ‘일벌레’인 그녀를 아꼈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일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가 디자인한 패브릭 제품이 잘 팔리니까 너무 기뻤습니다. 더 많은 고객을 만나고 싶은 욕심에 사장님한테 대리점 오픈을 제안했더니 저한테 한 번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직원 몇 명 데리고 대리점 오픈을 맡아서 진행했죠. 회사가 커지면서 대리점도 늘었고, 저는 디자인 업무를 하면서 대리점 오픈 진행까지 도맡아 하면서 너무 바빴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당시 대리점 오픈을 진행했던 게 지금에 와서는 많이 도움이 되긴 하죠. 그러고 보면 세상에 공짜는 없나 봐요. 뭐든 배우면 써먹을 일이 언제든 생기는 법이니까요.”
세상에 데코뷰를 내놓다
직장 생활 4년차가 되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디자인이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는지, 어떤 원단을 갖고 공장에 오더를 줘야 마진이 얼마가 남는지 자연스럽게 계산이 나왔다. 혼자 해도 자신이 받고 있는 월급 이상은 영업이익이 나올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 주저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때가 2006년 11월말이었다.
그녀는 동대문 도매상가에서 원단을 구매해 공장에 주문 제작을 맡겼고, 완제품의 사진을 찍어 옥션에 올려 팔기 시작했다. “대학 때는 갖고 싶은 걸 사려고 옷장에 있는 옷들을 꺼내서 중고 장터에 팔곤 했는데, 디자인부터 원단 공수, 공장 오더, 다림질까지 모든 과정에서 제 손을 거친 제 제품을 파니까 너무 감격스러웠죠. 게다가 고객 반응도 좋아서 이만하면 창업을 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죠.”
그 해 12월 ‘데코뷰’라는 이름으로 개인사업자 등록을 했다. 데코레이션(decoration)을 선도하면서 데코의 뷰(view)를 제시하겠다는 철학을 담았다. 옥션을 통해 고객의 반응에 자신을 얻은 정 대표는 웹호스팅업체 카페24를 통해 독자 사이트도 열었다. 첫 아이템은 주문제작 커튼으로 정했다.
“당시 30평형 거실과 방 3개를 기준으로 커튼을 주문 제작할 경우 150만원 선이었죠. 하지만 데코뷰가 내놓은 주문제작 커튼은 50만원 선으로 시중가의 3분의 1 수준에서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포인트 커튼으로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내놓으니까 고객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기존 인테리어 업체들이 버티고 있는 시장에 데코뷰가 진입하는 전략은 가격 경쟁력과 차별화된 디자인이었다. 트렌디한 감성을 담기 위해 자카드나 자수지 중심의 천편일률적인 원단 선택과 제한적인 디자인에서 벗어나 면이나 시폰 등으로 원단을 다양화하며 디자인의 선택지도 넓힐 수 있었다.
대량 생산 체제에 비해 생산 비용이 클 수 밖에 없는 주문 제작을 선택하면서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주문 제작이란 영역을 대중적으로 풀기 위해선 원단비, 재단 시간, 봉제 시간, 인건비 등을 전체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개별적인 비용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원가 계산이 가능한 거니까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건 어느 누구보다 확실히 익혔다고 생각하고, 그게 창업 과정에서 소중한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맞춤 시장에서 기존에는 없었던 단가가 형성됐던 거구요.”
물론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던 첫 시도에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난관은 공장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정 대표는 “주문을 넣으면 처음부터 할 수 없다고 버티는 분들이 많았어요. 아무래 말씀을 드려도 설득이 안 되면 결국 같이 할 수 없는 거라도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여러 공장과 접촉하다가 저와 가장 호흡이 맞을 것 같은 분들과 시작을 하게 됐어요. 다행히 본사가 있는 일산에서 공장을 구해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답니다. 제 기준을 지키려면 다른 사람에게 끌려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업 초기에는 컴퓨터 하나 들여 놓고 집에서 사업을 진행했다. 주문 제작인 만큼 전화 상담도 직접 했고, 디자인을 해서 완제품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 사이트에 신제품을 등록하는 일도 정 대표의 몫이었다. 신제품이 나오면 상품설명서를 새로 올리고 공장에서 제품이 도착하면 택배 포장해서 고객에게 보냈다. 그는 “제대로 웹 기술을 배운 적도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HTML이 눈에 들어왔다”며 “닥치니까 했고, 해야 하니까 끝까지 버텼다”고 회상했다.
정 대표는 2007년 초 택배 수량이 50개가 되던 날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시작해 억척스럽게 일궈낸 성과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는 아버지가 팩스를 하나 사서 들고 오셨다고 한다. 매일매일 공장에 작업지시서를 넣어야 하는데 팩스 살 돈도 아까워서 전화로 작업 지시를 하는 딸내미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실밥에다 먼지까지 뒤집어 쓰면서 원단 갖고 씨름하는 딸에게 차라리 아빠 회사 들어와서 경리를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깡으로 버텨내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단골이 하나 둘씩 늘면서 사업도 조금씩 안정됐다. 그는 2007년 봄 일산 행신동에 쇼룸을 겸한 사무실을 얻었다. 유동인구가 적어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5만원이었다. 직원 한 명 두고 사무실까지 얻어 사업에 나선 만큼 정 대표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 해 말에 화정동으로 옮겼고, 이듬 해에는 30평대 넓은 공간으로 옮겼다. 커튼에서 시작한 사업이 지금은 이불이나 매트커버 등 침구류, 쿠션과 방석 등 데코레이션, 앞치마와 식탁보 등 주방소품, 실내화와 티슈커버 등 인테리어 소품, 낮잠이불과 범퍼 등 키즈 제품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블루밍빌레를 넘어서겠다는 포부로 전진하다
디자이너 출신인 만큼 정 대표는 디자인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회사가 자리를 잡아가자 2012년 디자인연구소도 설립했다. 지난해 매출은 170억원, 올해는 330억원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 동안 데코뷰 사이트를 중심으로 온라인 영업을 했지만 최근에는 오프라인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롯데백화점 잠실점과 평촌점에 입점했고, 올해는 5곳에 추가로 들어갈 예정이다.
“지난 해 모 백화점에서 봄과 여름에 팝업스토어를 진행했는데 하루 매출이 1,000만원을 넘었어요. 백화점 담당자가 깜짝 놀라서 저희 회사한테 입점하라고 제안했구요. 그 소문이 나니까 백화점 3사에서 동시에 제안이 왔고,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한 롯데와 손을 잡은 거죠.”
이 회사는 창업 초기부터 한 제품이라도 4가지 콘셉트로 나눠서 디자인을 개발했다고 한다. 디자이너가 제시하는 스타일링이 고객에게는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맞춰 집을 꾸미는 다양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래서 데코뷰의 심볼도 카멜레온이다. 세상의 트렌드를 발빠르게 읽어서 고객의 개성과 라이프스타일에게 맞게 디자인을 제시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정 대표는 몇 년 안에 우리나라 패브릭 브랜드도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 업체를 따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 동안은 유럽에서 주도하는 리빙 스타일이 글로벌 트렌드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한국 기업의 디자인 역량이 많이 높아지면서 그들과 어깨를 겨눌 수준까지 왔다는 것. 몇 년 지나면 오히려 그들을 제치고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선두 자리에는 데코뷰가 자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글로벌 리빙 시장을 선도하는 덴마크 리빙 브랜드 ‘하우스닥터(House Doctor)’나 ‘블루밍빌레 (bloomingville)’를 넘어서고 싶습니다. 현재 데코뷰가 패브릭 중심이지만 향후 영역을 넓혀서 고객의 홈스타일링 전반에 녹아 드는 브랜드로 성장할 거에요. 그래서 ‘디자인의 본고장’ 유럽으로 역진출하겠습니다.”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힘들지만 참고 열심히 달리면 결국 내 몸에 체득되기 마련입니다. 직장생활부터 창업 이후 지금까지 몰입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남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고민한 것들이 결국 내 몸에 체득되고 실력을 발휘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땀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도전하세요.”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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