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의 ‘늑장공시 파동’ 이후 제약업체들이 이른바 악재성 이슈에 대해 ‘자진신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계약 파기와 같이 의무공시 대상이 아닌 임상 중단 등의 사안도 공개해 한미약품 사태 이후 바닥에 떨어진 제약업계의 신뢰도를 회복하려는 의도다.
17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형 제약사들은 향후 신약개발 관련 임상 중단 등의 이슈를 자진해서 외부에 알릴지를 놓고 저울질 중이다. 국내 제약사들은 기술수출이나 임상 돌입 등에 관한 이슈는 공시나 언론자료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임상 중단 및 실패와 같은 사안은 제대로 알리지 않아 “투자가에 대한 기만행위”라는 비판이 지속돼왔다.
하지만 최근 한미약품이 신약기술수출 해지 사실을 늑장공시했다가 창사 이래 최대 위기로 몰리자 업계 분위기도 크게 달라졌다. 녹십자가 지난 13일 오전 혈우병 치료제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 중단 사실을 보도자료를 통해 증시 개장 이전에 알린 것이 대표적이다. 같은 날 미국 식품의약국(FDA)에도 임상 중단 사실을 보고했지만 시차를 감안하면 국내에 10시간가량 빨리 관련 소식을 알린 셈이다. 이 같은 악재 발표 이후 주가가 연이틀 4%가량 떨어지자 동종 업계에서는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녹십자 관계자는 “임상 중단 사실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이후에도 의무공시 사안이 아니더라도 투자자들의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사안이 있다면 사전에 알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나이티드제약도 장 마감 직후인 12일 오후4시17분에 중국 업체 장시지민커신집단유한공사(JJK)와의 개량신약 공급계약 해지 사실을 공시했다.
또 제약업체들은 앞으로 기술수출 계약 시 총 계약 규모를 강조하지 않고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 등을 명확히 설명해 ‘계약 규모 부풀리기’와 같은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을 방침이다. 다만 이 같은 업계의 자정 노력이 상시화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대형 제약사의 한 관계자는 “한미약품 사태 이후 의무공시 사항이 아닌 각종 악재성 이슈도 자진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내부에서도 조성되고 있지만 ‘굳이 손들고 매 맞을 필요가 있느냐’는 식의 내부 반론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미약품의 기술수출 ‘대박’ 이후 국내 기업의 신약개발 역량도 한 단계 도약한 만큼 관련 관행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꿔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윤선주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 책임연구원은 “신약개발 시 임상 중단 등은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며 “이 같은 이슈가 계속 공개될수록 신약개발 과정에 대한 투자자들의 이해도가 높아져 궁극적으로 관련 생태계에 이롭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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