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가정용에서 산업용 판매 적자를 메꾸는 전기요금 체계를 겨냥해 ‘낡은 성장 모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같은 기업 투자와 수출 중심의 낡은 성장 모델을 깨고 가계의 소비를 축으로 하는 소득주도 성장을 해야 3%대 성장률 달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 이주열 한은 총재에 이어 저출산·고령화가 우리 잠재성장률을 갉아 먹는 최대 성장 걸림돌이라며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박 전 총재는 2일 서울 남대문로 한은 본관에서 간부를 대상으로 하는 조찬 강연 후 기자들과 만나 “성장 엔진이 (기업에서 가계로) 바뀌었는데 낡은 엔진 그대로 가고 있는 게 한국경제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요금”이라고 지적했다.
박 전 총재는 기업용에서 적자를 보고 이를 가정용에서 메꾸는 전기요금 체계가 기업 투자와 수출 중심의 낡은 성장 모델의 잔재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전의 생산원가가 ㎾당 113원인데 산업용은 ㎾ 81원이고 가정용은 구간 평균으로 ㎾ 281원이다. 한전은 산업용에서 빚지고 가정용에서 많이 받아 대기업에 보조금을 주면서 올해 14조원의 이익을 낸다”고 목소리를 높여 비판했다. 이어 “가계는 성장이 누출되고 대기업이 성장을 견인하는 이런 (낡은 성장 모델) 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산업용은 올리고 가정용은 내려야 그게 새로운 성장 (모델에) 맞다”고 강조했다.
비단 전기요금의 문제만이 아니다. 박 전 총재는 “(과거 성장 모델에서는) 생산만 하고, 공급만 늘리면 됐다. 그래서 외국에서 외채까지 얻어다가 대기업에 투자하도록 하고 가계엔 소비를 줄여서 저축을 해 대기업에 투자자금을 대주라고 했다”이라며 “대기업은 성장 견인의 기관차고 가계는 성장 바람을 빼는 누출로 본 것이다”고 말했다. 이제는 이 엔진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박 전 총재의 설명이다.
박 전 총재는 우리 경제가 적어도 3%대 이상 성장을 해야 하는데, 가계의 소비가 새 성장엔진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투자와 수출은 제조업의 국제경쟁력이 있어야 살아남는데 근데 중국의 저비용에 밀려 경쟁력을 상실했다”며 “소비는 국제경쟁력과 무관한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경제를 끌고 갈 수 있는 것은 소비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의 성장뿐만 아니라 복지를 통해 가계 소득을 늘려주는 ‘병행정책’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박 전 총재는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부의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했다. 그는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최대 성장 걸림돌, 장기침체의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라며 “결혼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아이를 두는 것인 안 두는 것보다, 1명 두는 것보다 3명 두는 것이 더 이익이 되도록 정부가 사회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어 “구체적으로는 결혼 후 출산과 육아, 교육 부담을 사회가 져야 한다. 여성의 임산과 출산에 따른 직장에서의 불이익이 전혀 없도록 해야 한다”며 “또 그린벨트에 신혼부부 전용 장기임대주택을 지어 저소득 신혼부부가 모두 그 혜택을 누리도록 해 주거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강연회는 지난 7월 한국경제학회가 발간하는 한국경제포럼에 실린 ‘한국경제 위기와 구조개혁’ 논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논문은 한국경제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증세를 통한 적극적인 소득재분배를 통해 가계소득을 늘리고, 구조개혁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방법을 통해 각 이해집단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구조개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