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8월1일 오후 2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척후선이 나일강 입구 아부키르만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찾아냈다. 어디론가 사라진 나폴레옹을 뒤쫓은 지 두 달여 만이다. 영국은 3만7,500여 병력이 탑승한 나폴레옹 함대의 상륙지점을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로 예상하고 주력 함대를 배치했으나 헛짚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처음부터 이집트였다. 이집트 점령으로 상업제국 영국의 대(對)인도 관계를 간접적으로 옥죄겠다는 의도에서다.
프랑스 혁명정부의 기린아로 떠오른 29세의 장군인 나폴레옹은 영국을 치는 척 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5개 항구에서 전투함과 수송선을 출발시켜 카이로에 닿았다. 나폴레옹은 운이 좋았다. 강력한 바람이 붙어 함선들의 고속항해가 가능했던 데다 위기도 살짝 살짝 빗겨갔다. 반대로 나폴레옹보다 11살 위였던 영국의 넬슨 제독은 운이 나빴다. 짙은 안개로 인해 코 앞에서 대규모 프랑스 함대를 놓친 적도 있다.
지중해 전 구역을 샅샅이 수색하던 넬슨은 풍랑으로 기함인 뱅가드호의 주돛대(마스트)가 부러지는 사고에도 추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하들의 불만이 높아지던 무렵, 넬슨은 마침내 ‘적 함대 발견’ 보고를 받았다. 프랑스도 영국 해군을 발견했으나 양 함대의 거리가 좁혀진 오후 6시까지 경계를 강화했을 뿐 별다른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정찰을 거쳐 작전계획을 세운 뒤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게 해전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태양이 지중해의 수평선에 잠길 무렵 넬슨은 전열함* 13척을 소총 사정거리까지 접근시켜 선공을 퍼부었다. 새벽 2시경 사실상 승부가 결정된 나일 해전은 이튿날까지 산발적인 포화를 주고 받았다. 결과는 영국의 압승. 영국은 218명이 죽고 677명이 부상 당한 반면 프랑스의 피해는 전사 1,700명, 부상 600명, 포로 3,000명에 달했다.
물질적인 피해는 더욱 컸다. 전열함 13척 가운데 3척이 격침되고 9척을 빼앗겼다. 프리깃(5급 전열함) 2척도 잃었다. 프랑스 해군 함선 중에는 전열함 2척과 프리깃 2척만이 간신히 도망쳤다. 나포된 프랑스 함정 중 두 척은 영국 해군기를 달고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하는 기록도 세웠다. 영국 해군의 피해는 대파 1척과 좌초 1척에 그쳤다. 유럽국가들이 치렀던 어떤 해전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압승이었다.
객관적 전력에서 앞섰던 프랑스 해군은 왜 졌을까. 함포 숫자에서 프랑스는 모두 1,180문으로 1,112문인 영국을 앞섰다. 13척이 모두 함포 73문 짜리 3등 전열함이던 영국 해군과 달리 프랑스 해군은 함포 120문이 달린 1급 전열함도 운용하고 있었다. 주력인 전열함의 크기에서 앞서고 함포 구경도 컸으며 해안포대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에도 프랑스 해군이 전멸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휘관의 판단 착오와 무능과 탓이다. ‘지친 상태인 영국 해군이 야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판단한데다 함정과 해안포대는커녕, 함정끼리의 유기적 운용도 전혀 없었다. 반면 넬슨은 전투 시작 전에 함대 장병들에게 저녁 식사를 충분히 먹이고 각 함정 간에 전등으로 피아간 식별 표시까지 달았다. 넬슨 자신은 여느 전투와 마찬가지로 앞장서 돌격과 포격을 지휘했다.
나폴레옹에게는 일생 첫 패배를 안긴 나일 해전은 근대사의 흐름도 갈랐다. 프랑스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유럽 각국은 자신감을 얻고 2차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애써 확보했던 이탈리아와 지중해의 패권을 잃었다.
나일 해전의 영향과 의미를 넬슨이 전사한 트라팔가 해전(1805년)보다 높게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트라팔가 해전은 영국 본토로 침공하려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한 데서 끝났으나 나일 해전은 지구 전체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집트에 발판을 마련해 시리아로 진격, 오스만튀르크를 속국으로 삼고, 홍해를 넘어 인도의 지배권을 영국에게 빼앗아 알렉산더와 로마를 합친 것보다 큰 제국을 이루려던 나폴레옹의 야망도 나일 해전에서 꺾였다. 1869년 완공 개통된 수에즈 운하도 이집트 원정 당시 나폴레옹이 동반했던 학자들이 구상한 것이다.
나일 해전 이후 영국은 인도 지배가 유럽의 역학 관계에 의해 위협 받을 수 있다고 판단,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케이프타운을 1805년 영구점령, 식민지로 삼았다. 1882년에는 유럽인 살해를 명분으로 지중해함대 소속 근대식 전함 15척을 동원해 나흘간 포격을 퍼부은 끝에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이집트는 영국의 반식민지로 떨어졌다. 영국의 케이프타운과 카이로 점령 이유는 인도에 대한 지배권 강화에 있었다.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캘커타로 이어지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각국의 대외 팽창 정책과 충돌 및 화해 과정을 거치며 20세기 초반 국제 정세의 기본 틀을 짰다. 프랑스와는 화해와 협력, 3B(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정책을 추진한 독일과 영국 간 충돌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나일 강 해구에서 일어난 해전을 둘러싼 이해다툼이 종국에는 세계대전으로 번진 셈이다.
나일 해전 218주년, 갈등과 다툼은 과연 끝났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인도의 유력 정치인들은 최근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한 수탈을 보상받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군이 포환을 교환했던 중동에서의 증오와 대립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으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전열함(戰列艦·ship of the line)은 17~19세기 범선 시대에 유럽 열강들의 주력함. 함대가 한 줄로 늘어서는 전열(line of battle)을 형성해 포격전을 벌일 목적으로 제작됐다. 나라마다 1등급 전열함에서 5등급, 또는 7등급 전열함으로 분류하는 차이가 있으나 대개 74문의 포를 탑재한 3급 전열함이 많았다. 넬슨이 탑승했던 함대의 기함인 벵가드호(1,644t·1787년)의 건조비는 약 3만9,000 파운드. 노동자 임금 상승을 기준 삼을 때 요즘 5,662만 파운드(우리 돈 836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현대 해군에서 이 정도 예산으로는 주력전투함은커녕 200t급 고속정 가격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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