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달 들어 20일까지 국내외 주요 계열사를 찾지 않았다. 외부 행사도 지난 7일 대한핸드볼협회장 자격으로 태릉선수촌을 방문, 다음달 올림픽 출전을 앞둔 핸드볼 여자 국가대표들을 격려하고 9일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천민얼 중국 공산당 서기와 만난 게 전부다.
조만간 리우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브라질로 떠나지만 이 또한 ‘부대 행사’일 뿐이다.
올해 설날(2월8일)만 해도 오전엔 SK이노베이션 울산 사업장을, 오후에는 SK하이닉스 청주 공장을 방문할 정도로 상반기 내내 지칠 줄 모르고 현장을 누볐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지난달 말 그룹 전체에 뼈를 깎는 혁신안을 주문한 최 회장은 주요 계열사들이 자유롭게 계획을 만들기를 바라고 있다”면서 “자신의 움직임 하나, 말 한마디에 임직원이 얽매이는 것을 우려해 동선을 가급적 줄이고 있다”고 했다.
“변화를 위한 변화는 금물이다.”
이는 요즘 최 회장이 주요 경영진에 연일 강조하는 말이라고 SK 고위관계자가 전했다. “하반기 대대적 혁신 작업이 보여주기용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게 최 회장의 분명한 뜻이다. 최대한 자신의 움직임을 줄여 과도한 메시지 전파를 자제하되 다양한 계열사들이 각자 사업 특성에 맞는 실질적 혁신안을 도출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SK 관계자에 따르면 최 회장은 “임직원들이 보기에 굳이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업·조직은 그대로 밀고 나가도 좋다”고도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공개 발언을 봐도 마찬가지다. 최 회장은 계열사마다 혁신이 필요한 내용을 직접 지적하기보다는 구성원들의 위기의식만 다지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30일 SK 핵심 경영진에 정기 최고경영자(CEO) 세미나가 열리는 오는 10월까지 계열사별 혁신안을 마련해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서든데스(sudden death·돌연사) 할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다. 이어 최 회장은 7일 공개된 SK㈜의 ‘2016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 따르면 1950년대 세계 5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은 45년이었지만 지난해는 15년에 불과하다”며 또 한 번 위기의식을 설파했다. SK 안팎에서는 10월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조직문화 혁신에서 인수합병(M&A), 사업 재편에 이르는 굵직한 개혁안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혁신안을 짜는 계열사들의 모습도 획일적이기보다는 자유분방해 보인다. 최 회장이 계열사 구성원들이 최대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한 덕분이다. SK 철학인 “따로 또 같이”와 일맥상통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 회장의 특명이 떨어진 후 SK 계열사들은 위에서 강제하는 혁신이 아닌, 아래부터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혁신안을 내놓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했다. 계열사들은 사장부터 직원들까지 참여하는 혁신 워크숍·회의를 연일 벌이고 있다. 사내 익명 온라인 건의공간을 만드는 등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창구도 여러 개 마련했다.
SK 계열사 CEO들도 한결 유연한 자세로 자율 혁신에 모범을 보이는 모양새다. 천편일률적으로 혁신을 준비한다며 불필요한 보고서·회의를 지시할 경우 임직원들에 업무 부담만 가중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일례로 정철길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2주간 여름휴가를 떠난다는 계획을 이달 초 임직원들에게 공개하고 자유로운 휴가 사용을 장려했다. 반면 SK케미칼·SK하이닉스 등은 대부분의 임원이 주말까지 반납할 정도로 혁신안 짜기에 매진하고 있다. 미래 성장 계획에 더해 반도체 사업의 글로벌 시황 악화까지 대처해야 하는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은 휴가 일정도 아직 잡지 못했다. SK하이닉스는 이달 초에도 하반기 임원 워크숍을 열고 D램 메모리 이후 회사를 먹여 살릴 주력 제품의 개발 전략과 조직 문화 혁신 방안 등을 집중 논의했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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