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나무 둥치에서 발아한, 흙으로 빚은 사내는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뿌리는 땅에 박혀 있었어야 했다. 하늘로 치켜든 나무의 뿌리는 죽음을 거부한 시시포스처럼 섭리에 도전한 것이니, 여기서 돋아난 사내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천형을 견뎌야 했다. 삶은 버티는 것이요, 위태로움은 그런 삶의 본질이란 말인가. 매달려 있음에도 어떻게든 고개를 들어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인간의 모습에서 생(生)에의 의지를 배운다.
43세에 간경화로 요절한 천재 조각가 류인(1956~1999)의 타계 전 최후 유작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북촌로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6월 26일까지 계속되는 개인전 ‘경계와 사이’다. 1997년부터 제작한 이 작품에 고인이 어떤 제목을 붙였는지 알 길 없어 ‘작명미상’으로 남았다. 대신 직접 쓴 작가노트가 곱씹힌다. “나에게 흙은 곧 작업의 시작이자 끝을 의미한다.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조각에서 그 표현방식들의 긴 여행은 흙으로 시작해 다시 흙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류인은 김복진, 권진규의 계보를 잇는 구상조각가이자 한국 근현대 조각의 대표작가로 꼽힌다. 그가 활동하던 1980년대는 추상조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었지만 류인은 꿋꿋이 인체를 주제로 억세지만 힘있는 구상조각을 선보였다.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중앙미술대전, 한국일보 청년작가 초대전 등을 휩쓸었고 1993년 문화부가 수여한 ‘오늘의 젊은 작가상’을 거머쥐었다. 대표작 ‘급행열차’ ‘심저’ ‘입산’ 등은 몸뚱이나 팔다리가 부서지고 왜곡된 형태지만 역동적이었고, 전후 폐허에서 근대화·산업화를 이뤄낸 한국의 패기를 떠올리기 충분했다. 청동작품으로 유명한 고인이기에 마지막 손길이 느껴지는 흙과 나무 소재의 유작은 강렬하면서도 이채롭다.
1층 전시장의 1988년작 ‘입산’ 역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치솟아 부식된 하수도관에 걸터앉은 나체의 남성은 두 팔이 잘려 나갔다. 류인의 미망인 이인혜 씨는 “영웅주의적 형태의 대표작들과 다른 이 소년적 얼굴은 작가 자신을 많이 닮았다”며 “소신공양(공양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것)의 마음으로 팔을 자른 것 아닐까”라고 설명했다.‘자소상’의 인물은 담담하면서도 당당한 표정이다.
류인의 작품세계는 해부학적 인체연구에 기반한 프랑스 조각가 로댕, 거칠고 투박함의 미학을 일깨운 부르델을 압도한다. 평론가 최열씨는 그의 작품을 “표현적 리얼리즘”으로 규정했고, 비평가 조은정 씨는 “극한의 인간상이자 실존의 조각”이라고 했다. 매끈한 추상조각이 주도하던 작가 생전이나, 첨단의 현대미술이 선보이는 지금이나 잘리고 꺾이고 매달리고 뒤틀린 류인의 작품을 웃으며 감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며 자신의 영혼을 담아 인간의 실존을 얘기하고자 한 예술가의 처절한 목소리를 들으려면 고통을 즐길 기꺼운 준비가 필요하다. 그게 진짜 예술이다. (02)541-5701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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