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다. 혁신은 새로운 발상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혁신이 활발한 사회는 기회가 많아지고 생동감이 넘친다. 반대로 혁신이 부족하면 무기력이 찾아오고 사회의 역동성이 떨어지게 된다. 양적완화와 초저금리로 금융 시장에는 돈이 넘친다. 그러나 혁신은 드물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문제의 근원은 돈 부족이 아닌 혁신 부족이다.
현대 금융사를 잠깐 들여다봐도 혁신 사례는 넘친다. 고정환율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면서 외환 리스크가 급격히 커지게 됐다. 이에 시카고상업거래소는 밀턴 프리드먼 시카고대 교수에게 해결책을 의뢰했다. 프리드먼 교수는 농산물 거래에 이용되던 상품 선물 거래 방법을 돈(통화)에 활용할 것을 제안해 지난 1972년 국제 통화 시장이 창설됐다. 간단해 보이는 아이디어의 혁신으로 수많은 수출입업자가 환 리스크를 잘 관리할 수 있게 됐다.
금융회사 채권부장이었던 마이클 밀켄은 신용등급이 낮은 채권은 수익률이 높을 뿐 아니라 통념보다 리스크가 작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통찰을 바탕으로 고수익·고위험 채권 시장인 정크본드 시장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자본시장 접근이 어려웠던 중소기업과 벤처기업들에 자금 조달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됐다. 밀켄은 금융사기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의 혁신적 아이디어는 금융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임에는 변함이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금융혁신으로 불리는 핀테크는 전통적 금융기관들보다 애플·아마존·페이팔 등의 비금융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처럼 IT 기업들이 혁신을 주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칠게 표현하면 IT 기업들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연관이 없는 점들을 연결하기를 금융기관들보다 훨씬 잘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혁신을 위해 기꺼이 ‘멍청해질 수 있는(stay foolish)’ 용기와 이를 허용하는 문화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은행·증권·보험 등 전통적 금융기관들의 혁신이 부진한 내부적 요인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혁신을 주도할 비전이 부족하고 금융인들이 보수적이라는 점이다. 혁신의 아이콘인 3M의 유명한 사례가 있다. 사장은 혁신적 연구를 장려하려 휴일에도 실험실을 개방하도록 했다. 하루는 순시를 하다 실험실 문이 잠긴 것을 발견했다. 사장은 전기톱을 사 들고 와 문을 도려냈다. 그러고 다음과 같이 써 붙였다. 다시는 문을 잠그지 말 것.
미국 칼럼니스트였던 아트 부크월드는 “넥타이는 권위에 대한 복종의 상징”이라고 했다. 작금의 현실은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은행원들이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IT 직원들에게 밀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은행원들도 넥타이를 풀 때가 됐다. 아니 그보다 마음의 족쇄를 먼저 풀어야 한다. 금융 리더들은 혁신을 시도하다 실패할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그러면 혁신은 따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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