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영세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들은 최근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지난 17년간 싼값에 사용하던 반도체 설계 시스템을 자칫 내년부터 이용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는 미국 업체와 계약해 30억원짜리 온라인 반도체 설계 시스템을 구축, 중소 팹리스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예산이 삭감되면서 계약연장이 어려워졌다. 내년 8월에 끝나는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면 업체들은 수천만원씩 웃돈을 주고 각기 시스템을 이용해야 한다.
이 같은 고민은 팹리스뿐만이 아니다.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연구개발(R&D) 예산을 반 토막이라 할 정도로 대폭 줄이면서 업계 전반에 위기감이 짙게 배어 나온다.
반면 중국은 조선과 철강 등에 이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한국이 앞서 있는 양대 정보기술(IT) 분야에 정부 차원에서 수십조원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하하면서 민간 기업들을 지원, 국내 기업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20일 정부 주도 반도체·디스플레이 R&D 사업인 '전자정보디바이스 산업 원천기술 개발' 예산 추이를 조사한 결과 지난 2011년 1,312억4,500만원이던 규모가 매년 감소해 올해는 952억3,500만원까지 떨어졌다. 내년에는 40% 이상을 더 깎아 549억4,000만원 정도만 책정됐다.
5년 새 58.2%나 깎인 셈이다. 이대로면 신규 R&D는 꿈도 못 꾸고 현 사업을 지속하는 것도 빠듯하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는 90억원 정도를 증액해 기존 사업이라도 완료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이 있는 연구 예산도 삭감하는 반면 중국은 정부가 주도해 거대 자본을 투입하며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판을 키우고 있다. 지난해 중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한 21조9,000억여원짜리 국가 주도 펀드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정부도 약 7조원에 이르는 투자재원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로 한 중국 BOE의 경우 15억위안만 자체 조달하면 나머지 25억1,650만위안을 정부와 투자펀드로부터 지원 받을 수 있다.
이처럼 핵심 산업이라 할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미래를 놓고 한국과 중국 정부가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면서 국내 업계 관계자들의 불만은 극대화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중국이 추격하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이미 판세는 넘어갔다고 본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는 민간 기업에만 맡긴 채 방관하고 있다"며 "하루속히 종합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않으면 수년 안에 조선과 해운업종의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종혁기자2juzs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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