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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업계가 경기불황과 시장포화에 맞서 꺼내 든 '순한 술' 마케팅이 주류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위스키 업계는 위스키의 마지노선으로 불리는 알코올 도수 40도 이하의 신제품을 잇따라 쏟아내고 있고 소주 업계에는 과일맛 소주가 새로운 승부처로 부상하고 있다. 순한 술을 앞세운 소프트 마케팅이 시장을 강타하면서 불황일수록 독한 술이 더 잘 팔린다는 주류 업계의 공식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위스키 업계의 소프트 마케팅은 토종 위스키 업체 골든블루가 이끌었다. 골든블루는 지난 2009년 알코올 도수 36.5도의 저도 위스키를 일찌감치 선보이며 시장을 개척했다. 출시 초기만 해도 정통 위스키가 아니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국내 주류 시장의 바로미터로 자리 잡은 부산·경남 지역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저도 위스키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영남권 마케팅에 주력했던 골든블루는 이후 수도권에도 진출하며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초반에는 여성 고객이 주요 소비층이었지만 외산 위스키를 찾던 남성 고객까지 사로잡으면서 일약 위스키 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합리적인 가격에 외산 위스키 못지않은 품질을 갖췄다는 점이 골든블루의 최대 경쟁력이다.
골든블루가 저도 위스키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자 기존 위스키 업계도 일제히 국내 시장을 겨냥한 신제품 출시에 나섰다. 국내 1위 위스키 업체 디아지오코리아는 지난해 3월 2년여의 개발기간을 거쳐 준비한 알코올 도수 35도의 '윈저 더블유 아이스'를 내놓았고 같은 해 11월에는 프리미엄 저도 위스키 '윈저 더블유 레어'까지 선보였다. 영국 본사와 한국 연구진이 개발한 윈저 더블유 레어는 영국 왕실이 인증한 로열라크나가 증류소의 스카치위스키 원액에 대추 추출물과 참나무향을 첨가해 저도 위스키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페르노리카코리아는 지난해 8월 여성을 겨냥한 저도 위스키 '에끌라 바이 임페리얼'을 내놓고 맞불작전에 나섰다. 업계 최초로 파격적으로 알코올 도수 31도를 적용한 이 제품은 향수병을 닮은 용기에 석류향을 첨가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페르노리카는 지난해 10월에는 알코올 도수 40도에 출고가를 경쟁 제품보다 15% 낮춘 보급형 스카치위스키 '임페리얼 네온'까지 선보이며 차별화에 나섰다. 정통 위스키 특유의 풍미를 살리되 저도 위스키에 버금가는 부드러움도 갖췄다는 게 인기 비결로 꼽힌다.
저도 위스키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달아오르자 롯데주류도 알코올 도수 35도의 '주피터 마일드 블루'를 앞세워 주도권 탈환에 나섰다.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된 원액에 한국인이 선호하는 위스키 고유의 풍미를 구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지난해 3월에는 17년산 스카치위스키 원액에 과일향을 넣은 '주피더 마일드 블루 17'까지 내놓으며 제품군을 강화했다. 저도 위스키가 주류로 떠오르자 글로벌 1위 싱글몰트위스키 '글렌피딕'을 판매하는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도 이르면 다음달 국내 시장을 겨냥해 저도 위스키를 선보일 예정이다.
소주 업계는 과일맛 소주를 앞세워 격전을 벌이고 있다. 과거 18~21도였던 알코올 도수가 최근 3년 새 16~19도로 낮아지더니 이제는 12~14도의 과일맛 소주가 주류로 부상한 것이다. 롯데주류가 지난해 4월 '순하리 처음처럼'으로 과일맛 소주 돌풍을 일으키자 하이트진로가 '자몽에 이슬로'로 반격했고 무학은 '좋은데이 컬러' 시리즈로 가세했다. 올 들어 판매량이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소주 특유의 강한 맛과 향이 덜하고 목 넘김이 좋아 여전히 20~30대 여성이 꾸준히 찾는다.
최근에는 알코올 도수를 3도까지 낮춘 탄산소주까지 등장하며 저도주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보해양조는 지난해 9월 '부라더소다'를 내놓은 데 이어 최근 후속작인 '부라더소다 딸기라 알딸딸'까지 출시했고 롯데주류는 알코올 도수 4.5도의 '설중매 매실소다'를 선보였다. 영남권 주류 업체에서 전국으로 판매망을 넓힌 무학도 과일향을 넣고 알코올 도수를 5도로 낮춘 탄산소주 '트로피칼이 톡소다'를 출시하며 탄산소주 경쟁에 뛰어들었다.
주류 업계가 저도주 출시에 잇따라 뛰어드는 것은 '폭탄주 문화'로 대표되는 음주문화가 차분하게 술 자체를 즐기는 문화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한 술을 일방적으로 권하는 대신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술을 찾는 선진국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주류산업협회에 따르면 2007년 283만8,304상자(500㎖·18병 기준)에 달했던 국내 위스키 출고량은 지난해 상반기 84만8,044상자까지 줄어들었다. 소주 업계 역시 올 들어 3년 만에 출고가가 인상되면서 판매량 감소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주류산업협회 관계자는 "저도 위스키가 지난해 위스키 시장을 강타하면서 알코올 도수 40도 이하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역대 최대인 21.6%까지 늘었다"며 "위스키와 소주는 독하다는 편견이 깨지면서 당분간 국내 주류 시장의 저도주 열풍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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