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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증시가 무너질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연기금이 올 들어서는 좀처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연초 이후 코스피가 박스권 하단인 1,800선 초반까지 곤두박질쳤지만 연기금은 선뜻 순매수 카드를 꺼내지 못했다. 중국발 쇼크에 이은 글로벌 경기둔화 우려 확산으로 시장 예측이 어려워지자 연기금도 적절한 투자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올 1~2월 유가증권시장에서 총 1,302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수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연기금의 순매수 금액(1조6,740억원)의 10%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특히 연기금이 모처럼 하루 1,000억원 넘게 순매수했던 지난달 29일을 제외할 경우 연기금의 올 1~2월 순매수 규모는 117억원에 불과하다. 지난 1월에는 오히려 379억원을 순매도하기도 했다. 연기금은 그동안 국내 증시가 속절없이 무너질 때면 대규모 매수주문을 쏟아내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지만 올 들어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실제 지난해 7월 유가증권시장에서 순매도를 기록했던 연기금은 8월 코스피가 2,000선이 무너진 데 이어 급기야 1,820선까지 추락하자 1조원 넘는 주식을 사들이며 추가 붕괴를 막기도 했다. 하지만 올 1월과 2월 코스피가 두 차례나 1,850선이 무너졌음에도 연기금은 요지부동이다.
연기금의 소극적인 투자전략은 추가 하락을 우려하는 시장 상황이 반영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종우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대내외 변동성 확대로 시장 상황이 지지부진하다 보니 추가 하락에 대한 우려로 연기금이 적극적인 매수에 나서지 못한 채 투자 집행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고승희 KDB대우증권 연구원도 "올 들어 글로벌 증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탓에 연기금도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운용자금 집행의 적절한 타이밍을 엿보는 분위기"라고 진단했다.
연기금의 맏형 격인 국민연금의 자금운용을 총괄하는 기금운용본부장이 내부 인사 갈등으로 공석이었던 점도 연기금의 적극적인 투자를 꺼리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이다. 지난해 11월 초 전임 홍완선 본부장의 임기 만료 이후 지난달 중순 후임 강면욱 본부장이 임명될 때까지 4개월 가까이 사실상 국민연금 기금운용 결정권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류용석 현대증권 시장전략팀장은 "국민연금의 자금을 운용·집행하는 책임자의 교체시기에는 공격적인 집행은 미룬 채 아무래도 소극적인 투자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연기금의 보수적인 투자전략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고 연구원은 "지수는 서서히 반등하는 모습이지만 여전히 확인해야 할 대외 이벤트들이 남아 있다"며 "경제지표의 회복세가 확인되고 중국 등 주요국의 재정정책이 발표될 때까지 연기금의 관망세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류 팀장은 "3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전 세계 금융시장의 방향성이 결정되고 증시의 변동성이 축소된다면 연기금의 주식 투자도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연기금은 올 1~2월 유가증권시장에서 LG생활건강(-1,777억원)과 아모레퍼시픽(-664억원) 등 밸류에이션(평가가치)이 높게 평가된 화장품주를 내다 팔고 포스코(1,856억원)를 비롯해 기업가치 대비 가격 메리트가 높은 낙폭 과대 종목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오승훈 대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극심한 변동성 장세가 이어지다 보니 주가 변동폭이 큰 고밸류에이션 종목은 덜어내는 대신 상대적으로 밸류에이션 부담이 적고 가격 메리트까지 보유한 종목들로 연기금의 매수세가 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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