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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70.학술도서 출판지원금
입력2003-09-22 00:00:00
수정
2003.09.22 00:00:00
한동수 기자
출판은 수많은 분야가 있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고도의 지적 산물인 학술도서는 지식의 보고로 학문과 기술의 발전은 물론 예술과 산업 발전,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해 더욱 중요시된다. 일본이나 스위스, 스웨덴, 캐나다 등 선진국들이 다양한 학술출판 진흥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오랫동안 학술출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거의 없었고 몇몇 기업이나 민간 학술단체에서 간간이 격려 차원의 지원을 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세계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국제화, 개방화를 통해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런 속에서 학술도서야말로 국력의 핵심으로 중요성이 갈수록 확대되는 추세이다. 우수한 학술도서를 많이 발간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학문과 예술, 과학기술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출판산업이 세계 10위라고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술도서 분야는 너무 빈약했다. 정부는 학술도서의 중요성은 인식하면서도 그 분야 진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신임 출협 회장이 된 나는 마냥 기다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학술도서의 대부분이 외국 저작물인데다가 지적소유권 협약과 저작권법 개정에 따라 저작권료를 지불하게 되면 가뜩이나 영세한 학술도서 출판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겨우 500부 또는 1,000부 정도 발행하던 도서의 수요마저 급격히 줄어들게 된 것이다. 복사기 성능이 좋아지면서 학생들이 한 권만 사서 대량 복사하여 사용하거나 복사집에서 무단 복사하여 값싸게 파는 때문이었다. 학술도서를 내던 출판사들은 출판의 의지를 잃었고 고사 직전에 놓였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번이나 문체부(현 문화관광부) 담당자를 찾아갔지만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출판문화의 주무 부서일 뿐 예산 배정이나 지원에 관한 한 요식적인 통과부서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경제기획원장관(당시 나웅배 부총리)을 직접 찾아갔다.
부총리를 만나 학술도서 출판이 당면한 어려움을 얘기하고 정부지원을 요청했다. 부총리는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면서도 “내 입으로 금년에는 민간에 대한 신규 예산지원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길 수 없지 않느냐”고 난처해 했다. 옆에서는 비서관이 대화내용을 메모하고 있었다.
“잘 알겠다”하고는 비서관과 함께 나와 “예산실장에게 전화해 달라, 바쁜 부총리를 자꾸 찾아올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비서관이 예산실장에게 전화를 하고 나는 그 길로 예산실장을 찾아갔다.
예산실은 그야말로 각 부처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가 예산실장을 찾아온 듯했다. 나는 학술도서 진흥에 대해 얘기하고 “부총리를 만나고 왔다. 예산만 올려 달라.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했다. 예산실장은 처음부터 민간단체에 대한 신규지원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시 또 부총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하자 예산실장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96년에 45종의 학술도서 제작 지원금이 배정됐다. 이것은 그 해에 민간단체에 배정된 신규예산 지원 중 유일한 것으로 안다. 예산을 배정 받는다는 것은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처음 배정 받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예산을 배정 받으면 연속성이 있어 이듬해에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술도서의 지원이 소폭이지만 해마다 늘어나게 되면서 중단 위기에 처했던 학술도서 출판이 명맥을 잇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고, 미력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은 지원규모가 빈약한 편이어서 앞으로 정부 차원의 더 큰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동수기자 best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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