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자금은 넘쳐흐르지만 단기상품에만 몰리고 금리 하락세마저 주춤해지자 한국은행의 통화완화 정책이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와 맞물려 한은이 유동성 함정을 우려해 금리인하 속도를 조절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금의 부동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구조조정 작업과 세제혜택 등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적 완화 정책 한계 왔나=한은은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했던 지난해 9월 이후 총액한도대출 증액(1조9,000억원), 환매조건부채권 매매(15조9,000억원), 통안증권 중도환매(7,000억원), 국고채 단순매입(1조원), 채권시장안정펀드 지원(2조1,000억원) 등 21조6,000억원의 유동성을 공급했다. 그 결과 넘치는 돈들이 수익률을 쫓아 크레디트물로 흘러가며 양도성예금증서(CD)와 기업어음(CP) 금리가 지난해 12월 중순 이후 3~4%포인트가량 급락하는 등 단기자금시장 불안은 크게 완화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은의 유동성 공급 약효가 떨어지는 모습이다. CD와 CP 금리 하락세가 눈에 띄게 주춤해졌고 기대했던 회사채 및 위험성 높은 자산에 대한 투자 전이는 더욱 냉담해졌다. 특히 5일 실시한 한은의 정례 RP 매각에 32조원의 은행권 자금이 몰려들 정도로 은행권의 몸사리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한은이 막대한 돈을 공급하고 있지만 금융시장 전체를 안정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유동성 정책 효과가 서서히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은, 금리 딜레마 봉착=유동성 지원과 함께 금리정책도 그 효과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유동성 함정’이다. 유동성 함정은 기준금리를 내려도 가계와 기업의 소비ㆍ투자가 일어나지 않고 시장금리가 반응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일본은 지난 1999년부터 ‘제로금리’를 시행했지만 은행의 대출은 오히려 둔화됐고 시중자금은 빠르게 단기 부동화됐다. 우리나라 역시 사상 최저치인 현 2.50%의 기준금리가 유동성 함정에 노출되는 수준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성태 한은 총재도 최근 외부강연에서 “금융불안 시기에는 금리인하 효과가 제약적”이라며 유동성 함정에 대한 우려감을 내비쳤다. 경기부양이 필요하지만 마냥 금리를 낮출 수만은 없다는 속내다. 이 때문에 최근 한은 안팎에서는 심각한 경기침체를 감안할 때 금리를 추가로 내리기는 하겠지만 2% 아래로까지는 힘들지 않겠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오는 12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결정되는 금리수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시장에서는 국제통화기금의 -4% 경제성장률 전망과 급격한 경기침체, 이 총재의 경기부양 의지 등을 감안하면 이번에 0.50%포인트의 금리인하를 예상하고 있다. 반면 한은이 유동성 함정을 고려해 0.25%포인트만 낮춰 속도조절에 들어갈 것이라는 견해도 높다. ◇불확실성 제거 서둘러야=이처럼 통화정책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기업 구조조정과 재정정책 등을 통해 자금의 단기부동화 현상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문박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지금은 무작정인 금리완화 정책보다는 기업 구조조정 지원 등 보다 다변화된 정책을 고민해야 할 시점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신호를 줘서 돈을 돌게 만들어야겠지만 이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인위적으로라도 수익률을 높여주고 위험성을 최소화해 돈맥현상을 뚫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은 관계자는 “금융정책으로는 자금의 부동화를 해결하기 어렵다”며 “장기펀드 세제혜택과 무기명 비과세 채권 발행 등 수익률을 높여주는 재정정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 같은 불안시기에는 돈의 속성상 위험성을 줄여줘야 한다”면서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옥석 가리기 작업을 서둘러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돈이 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자금이 기업과 투자시장으로 흘러갈 수 있는 묘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