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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금융계의 고질적인 정치권력 눈치보기가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간 금융회사의 수장들이 번번이 물갈이되는 후진적 관행이 되풀이되면서 이명박 정부와 정치적 연고를 같이하는 금융지주 회장들이 레임덕에 시달리는 것을 비롯해 위아래 할 것 없이 보신주의가 만연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KB금융지주의 ING생명 인수건은 정치적인 이해득실과 보신 관행이 금융산업을 뒤흔드는 '정치금융'의 일단이 잘 드러난 사례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ING생명 인수건은 지난 9월 KB금융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후 3개월간 성과 없이 공전하는 상황이다. 표면적으로는 보험업황에 근거한 인수가격의 적정성이나 인수시기를 두고 이견이 발생했기 때문이지만 이번 공방전의 속살을 들여다 보면 금융권부의 정치 시녀화와 정권 말기 보신주의 등이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ING생명 인수를 완강히 반대하는 사외이사나 금융당국, 찬성파의 구심점인 어윤대 회장 등이 모두 대선 정국에서 정치권의 의중을 의식하고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일단 ING생명의 인수를 두고는 해석이 엇갈린다.
일부 사외이사는 ING생명의 인수가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KB금융의 전체 당기순이익에서 국민은행 비중이 무려 83%(올 3ㆍ4분기 기준)에 이를 정도로 편중된 그룹의 수익원을 다원화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번 인수가 그룹의 도약을 가져올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ING생명의 수입보험료 규모도 4조1,000억원(2011회계연도)으로 2조2,000억원의 인수가격이면 저금리로 인한 업황 불투명을 인수 반대 명분으로 삼기에는 궁색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경재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8명의 사외이사가 내년 3월에 임기가 끝난다. 이 때문에 임기 말에 후일 책임소재를 따질 문제로 비화될 우려가 있는 중대 결정을 회피하려는 심산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반대파들은 내년이 되면 더 좋은 매물이 나올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지만 신한금융을 제외한 다른 지주사들이 하나같이 보험사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감안하면 내년에 더 좋은 조건에 우량 보험사를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말 그대로 희망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미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어 회장이 곧 바뀔 사외이사의 몽니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인수 의지가 확고한 어 회장도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표결 처리로 가부를 매듭짓지 못하고 사외이사 전원이 레드카펫을 깔아주기만을 바라며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다는 지적인 셈. 그 자신이 MB맨으로서 향후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 회장 리더십의 태생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다른 금융지주 수장도 정권 말기 권력 누수에서 시달리고 있다.
우리금융의 민영화 작업이 좌초되며 힘이 빠진 이팔성 회장이 직접 챙기다시피 한 하우스푸어 대책 트러스트앤드리스백(신탁 후 임대)은 시장에서 별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금융계의 한 고위인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권의 정실인사가 문제의 씨앗이 되고 있다"며 "납득할 수 없는 인사가 나면 시장은 바로 이를 알아차려 버린다. 내년에는 금융기관들이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정치적 입김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도 책임면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월 금융당국이 예정에도 없던 KB금융에 대한 재무건전성 점검에 들어간 것을 두고도 웅진그룹 사태 이후 정치권의 금융회사 감독 소홀이라는 책임추궁을 의식한 행보라는 냉소가 적지 않았다. 대선 주자나 금융당국 수장의 입에서 나온 인기영합적 발언이 빌미가 돼 수수료나 금리ㆍ보험료를 고무줄처럼 당겼다 놓았다 하는 일이 다반사로 빚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금융회사들도 자체적으로 문제해결을 모색하기보다는 정치적 행보를 밑바닥에 까는 경향이 짙다. 인수합병(M&A) 이슈로 물려 있는 국민은행, ING생명 노조는 서로 국정감사 운운하며 정치권을 자극하고 있다.
앞서 2월 하나금융과 외환은행의 노사 합의서 체결 당시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참석한 것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김 위원장의 행보는 개별 금융회사의 문제를 '노사정 합의'로 구속화하겠다는 노조 측의 입장을 받아준 격이 됐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대선을 맞아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사고에서 출발한 정책들이 쏟아지고 있다"며 "예를 들어 영세 중소가맹업자를 우대하기 위한 카드 수수료율 조정, 서민금융 및 하우스푸어 지원 대책 등은 효과가 미미하고 되레 선의의 피해자만 낳고 도덕적 해이만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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