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마지막 날, 금융위원회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경남은행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BS금융(부산은행)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조세특례제한법이라는 변수가 남아 있지만 부산은행의 경남은행 인수는 8부 능선은 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부산은행의 경남은행 인수는 두 지방은행의 합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 은행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시중은행을 능가(총 자산 기준)하는 지방은행이 탄생하기 때문이다.태생적으로 지방은행은 시중은행 밑에 있다. 시중은행이라는 용어 자체가 전국망을 지닌 상업은행을 뜻한다. 시중은행을 앞서는 지방은행이 탄생했다는 것은 은행산업의 옛 질서가 붕괴됐음을 의미한다. 판 자체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한 시중은행장은 "건전성 규제가 강화되면서 과거처럼 한순간의 위기로 은행이 망하게 될 가능성은 현저히 줄었다"며 "지금은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대로 각 플레이어(은행) 간에 무한경쟁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메가 지방은행'의 탄생, 지형도가 바뀐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2년 9월 말 현재 부산은행의 총 자산은 42조5,717억원으로 시중은행 중 규모가 가장 작은 씨티은행(54조6,026억원)에 비해 약 12조가량 적다.
그런데 부산은행이 경남은행을 인수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남은행의 총 자산은 32조2,720억원으로 두 은행이 합쳐지면 총 자산은 75조원을 넘게 된다. 씨티은행은 물론이고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62조3,754억원)마저 가뿐히 제친다. 이른바 '메가 지방은행'의 탄생인 셈이다.
이 같은 흐름은 국내 은행들의 무한경쟁 시대를 예고한다. 더욱이 지난 한 해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국내 은행산업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지적됐고 그에 따라 많은 종류의 개선 방안이 추진됐다. 여기에 현재로서는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고 있지만 교보생명의 우리은행 인수가 성사된다면 '어슈어뱅크'라는 새로운 형태의 은행 모델이 나오게 된다.
격변기에 영웅이 탄생하는 것처럼 급변하는 시장상황은 국내 은행들에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온다. 모든 은행들이 각자 자신만의 무기를 들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최근 1년만 놓고 봐도 일부 시중은행은 자산이 역성장한 반면 지방은행은 빠른 속도로 자산을 늘려가고 있다"며 "그 정도로 은행산업 여건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인데 은행 간 경쟁은 한층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해외진출=해외시장이 가능성의 세계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방식이다. 지난해 은행권을 강타했던 잇따른 해외지점의 비리·부실 문제는 그동안 통용됐던 글로벌 전략이 더 이상 효과가 없음을 보여줬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국내 은행들의 해외전략은 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현 수준에서는 '한국판 골드만삭스' '금융의 삼성전자'는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인정하라는 것이다. '한국형' 금융시장 발전 모델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올 초 열렸던 한동우 신한금융그룹 회장의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힌트가 될 만한 광경이 연출됐다. 이날 한 회장은 구체적인 글로벌 시장 진출전략을 알려달라는 질문에 "잘할 수 있는 분야에 뛰어들어야 하고 경쟁력 있는 나라에 가서 잘할 수 있는 분야 위주로 영업을 해야 한다"며 "그렇게 역량이 길러지면 후에 선진국에 뛰어든다"고 말했다.
때마다 제기되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류의 '뜬구름 잡기'식의 글로벌 전략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한 회장의 지적대로 결국 국내 은행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잘 아는 시장'에서 '잘하는 분야'를 무기로 싸우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김익주 국제금융센터 원장은 "수차례에 걸친 금융시장 발전 방안이 흐지부지됐지만 그렇다고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며 "중요한 것은 우리 수준에 맞는 금융 발전 모델을 만드는 것이고 당연히 우리만 할 수 있는 틈새시장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배구조 개선, 올해는 만들어야=은행이 풀어야 할 숙제는 성장성이나 수익성 같은 '장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은행은 정치금융이라는 우리나라만의 고질적 병폐를 갖고 있다.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이 막후에서 원격경영에 나서고 인사철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줄부터 서고 보는 게 우리나라 은행의 현주소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의 질적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최근만 해도 '금융시장의 빅뱅'으로 불릴 정도인 인수합병(M&A)의 큰 장이 섰지만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하며 시장을 선도하는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
장기 저금리로 수익성이 훼손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책임감을 갖고 새로운 실험에 나서는 CEO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릇된 지배구조가 만들어낸 보신주의의 결과다. 글로벌 유수의 은행들이 금융시장 급변에 발맞춰 자신만의 무기를 장착하고 있을 때 국내 은행들은 CEO 선임을 둘러싸고 소모적 논쟁에 빠져 있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소모적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3년 주기설'로 대변되는 정치금융, 여기서 비롯된 줄서기 문화, 그리고 관성의 법칙에 빠져버린 안일한 영업 관행 등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속된다면 은행산업 발전은 끝까지 찾아오지 않는 손님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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