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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16일. 당시만 해도 이름조차 생소했던 한국의 한 건설업체가 세계 건설시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당시 공사금액만 9억6,000만달러에 달하며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불린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 입찰에서 현대건설이 내로라는 선진국 업체들을 제치고 낙찰자로 선정된 것이다. 이 사업은 이후 리비아대수로와 함께 한국의 해외 건설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해외 프로젝트로 꼽히고 있다. 1970~1980년대 한국 건설업계의 중동 바람은 근면ㆍ성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산물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한국건설업계는 새로운 모습으로 글로벌 대역사를 이뤄나가고 있다. 세계 경제가 급속도로 변하고 건설산업도 점차 노동집약적인 구조에서 기술ㆍ자본집약적인 구조로 변모하면서 국내 건설사들도 플랜트ㆍ초고층 건축ㆍ신도시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써가고 있는 것이다. ◇해외 대규모 플랜트 독식 잇따라= 한국 건설업계는 플랜트 시장에서 주목과 견제를 동시에받고 있다. 중동의 대규모 플랜트 프로젝트를 잇따라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에는 총 83억달러 규모의 쿠웨이트 '알주르 정유공장 프로젝트' 4개 패키지를 현대건설ㆍ대림산업ㆍGS건설ㆍSK건설 등 국내업체들이 모두 따냈으며 올해 초에도 25억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와시트 가스플랜트' 공사를 SK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이 싹쓸이했다. 특히 현대건설 등은 가스를 액화석유로 전환하는 첨단 GTL(Gas To Liquid) 시공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등 기술력과 풍부한 시공경험을 앞세워 글로벌 플랜트 영토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실제로 최근 발표된 해외건설협회 통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건설업체들이 외국에서 수주한 공사금액 236억달러 중 플랜트가 전체 수주액의 75%에 해당하는 178억달러를 차지할 정도로 플랜트는 건설사들의 주력 수출 부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형 신도시, 세계로 가다= 대규모 신도시와 민간도시개발 경험과 첨단 아파트 시공능력은 한국형 신도시의 해외 수출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한화건설의 이라크 신도시 건설 수주다. 한화건설은 지난 5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동쪽 인근 신도시를 건설하는 합의각서(MOA)를 체결한 바 있다. 신도시 부지 조성과 동시에 국민주택 10만 가구를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총 수주 금액은 72억5,000만달러로 국내 건설업체가 해외에서 수주한 최대 규모다. 한화건설은 이 공사에서 설계와 조달, 시공 모두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참여할 정이다. ◇글로벌 랜드마크의 대표 시공사로 = 국내 건설업체들은 그동안 건축과 토목에서 쌓아왔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랜드마크 현장 곳곳에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 지난해 완공과 함께 828m로 세계 최고 높이 건물로 기록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는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작품이다. 삼성물산은 부르즈칼리파를 건설하는 데 상층부 첨탑을 올리는 첨탑리프트업 공법, 1㎠당 800kg의 하중을 견디는 초고강도 콘크리트 압송, GPS를 이용한 수직도 관리, 3일 만에 1개 층 공사를 마무리하는 '층당 3일 공정' 등 다양한 첨단공법을 도입해 세계인의 이목을 받았다. 지난해 6월 쌍용건설이 싱가포르에서 완공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도 해외 건축계에 대한민국 브랜드를 널리 알린 사례다. 쌍용건설이 이 호텔의 경사구조를 시공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사용한 포스트 텐션 공법과 특수 가설 구조물 설치 공법 등은 '21세기 현대 건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 공사 금액만 해도 약 1조원에 달해 수주 당시 대한민국 해외 건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건축 프로젝트로 평가를 받았다. ◇기본설계 능력을 키워라 = 국내 건설업체들의 EPC 사업과 랜드마크 빌딩 건축 능력은 세계 최고수준이지만 아직 미흡한 부분도 적지 않다. 아직은 부족한 기본 설계 능력을 배양하고 전문 플랜트 인력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과제가 남은 것이다. 김태엽 해외건설협회 실장은 "국내 건설업체들은 상세 설계와 실시 설계 측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기본 설계 능력이 부족하다"며 "지속적인 기술개발이나 해외 업체와의 M&A(인수합병)를 통해 원천기술(라이선스)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형 프로젝트 참여를 대비해 미리 파이낸싱 능력을 키워 놓는 것도 필수적이다. 김태엽 실장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 부분의 금융 제공 없이는 실질적으로 대형 공사를 수주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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