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분량의 대서사 2시간40분으로 압축
오케스트라·전통음악 결합 '아름다운 도전'
절규·비장한 분위기 넘버 반복 등 감정 과잉
흡인력 떨어뜨리는 LED 스크린은 아쉬움
말과 노래, 몸짓 안에 어찌 다 담을 수 있겠는가. 한 맺힌 역사와 치욕의 눈물을. 그래서 쉽게 끄집어낼 수 없었던 이야기이기에 한 편의 뮤지컬로 펼쳐진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저항과 수난의 기록은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3년의 준비 기간, 5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무대 위로 불러낸 그 시절 민초들의 애환. 신시컴퍼니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만든 창작 뮤지컬 ‘아리랑’이다.
지난 15일 프리뷰를 마치고 언론에 처음 공개된 아리랑은 무려 12권에 달하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2시간 40분이라는 시간 속에 비교적 조리 있게 담아냈다. 침략부터 해방기까지 다뤘던 방대한 원작과는 달리 뮤지컬은 1920년대 말까지로 시간을 한정했고, 수백 명의 등장인물은 감골댁 가족사를 중심으로 재편했다. 나라 독립을 위해 애쓰는 양반 송수익과 그의 머슴이었다가 일제 앞잡이가 되는 양치성의 대립을 중심에 세우고 그 속에 감골댁의 딸 수국과 득보-치성 간 삼각관계, 득보의 동생 옥비와 수익의 사랑 이야기를 녹여냈다. 1막에 다소 산만하게 펼쳐 놓은 다양한 인물과 감정선은 2막에서 하나로 묶여 묵직한 중심을 잡고 극을 전개해 나간다.
이 작품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도전이다. 최근 제작되는 다수의 창작 뮤지컬이 한국 색채를 지운 쇼 뮤지컬 위주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상황에서 한국 특유의 고통의 역사를 이야기 중심에 세운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도전을 더 빛내는 건 무대 위에 펼쳐진 다양한 음악적, 장르적 실험이다. 2시간 40분 공연 동안 작품은 창극이나 마당놀이 같은 전통 공연의 색깔을 입히며 기존의 뮤지컬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결이 맞지 않을 것 같던 19인조 오케스트라의 서양 음악과 그 위에 내려앉은 전통 소리는 다양한 분위기를 연주하며 작품에 녹아들었다. 때론 서정적인 아리아로, 때론 한 맺힌 창(唱)으로 그려내는 깊이 있는 감정선에 객석은 고요해진다.
도전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곳곳에서 발견되는 ‘너무 나간 의욕’은 아쉽기만 하다.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감정 과잉은 몰입을 방해한다. 고음과 합창으로 무장한 비장한 분위기의 넘버가 반복되는 데다 2막 중반까진 대부분 장면이 마치 공식인양 불끈 쥔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동작으로 마무리된다. 아리랑의 고선웅 연출이 ‘애이불비(哀而不悲·속으로는 슬프면서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체함)’를 이 작품의 특징으로 꼽았건만, 절규하고 몸부림치는 감정의 ‘강강강(强强强)’이 넘쳐난다. 이 속에서 정작 갈등의 중심축인 수익과 치성의 고뇌는 웅장한 음악이나 절규에 묻혀 휘발된다.
작품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LED 스크린도 내내 ‘잘못된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아리랑은 무대 세트를 거의 가져가지 않는 대신 극의 정서와 인물의 감정을 LED 스크린에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 위에 펼쳐지는 다양한 영상은 세트의 부재를 채울 만큼 흡인력 있어 보이진 않는다. 직설적이다 못해 뻔한 묘사에 치중하다 보니 극의 긴장과 분위기는 반감된다. 신시컴퍼니는 앞서 뮤지컬 ‘고스트’에서 LED스크린으로 현대적인 감각의 영상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은 바 있지만, 이번엔 그때와 같은 박수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2막 중반 민초들이 일본군 몰래 지하에 둘러앉아 숨죽인 채 신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은 그 어떤 모습보다 큰 울림을 준다. 여기엔 비장한 음악도, 기개에 찬 군무도, 화려한 LED 스크린도 없다.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어 대사도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일본인 캐릭터 대부분이 모든 대사를 일어로 처리하고, 스크린엔 한국어 자막이 떠오른다. 사실적인 묘사를 위한 장치였겠지만, 주요 부분만 포인트를 주고 나머지는 한국어로 소화해도 극의 전개상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9월 5일까지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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