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계 빚은 이제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핵심 요인'이다. 1,0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는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닌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번져나가는 양상이다. 경기둔화로 일자리의 질이 떨어지고 주택가격까지 급락하면서 취약계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음지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도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지만 과감한 행동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있다.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가 우려되는데다 경기침체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도 정권 말에 잘못 건드렸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모른다며 조심스러운 빛이 역력하다.
하지만 경제전문가들은 정권 교체기인 만큼 차기 정권 초기의 강한 힘을 바탕으로 부동산에 치우친 가계 부문의 포트폴리오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취약계층의 경우 사회 안전망 차원에서 재정 투입을 고려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저축 강국에서 가계부채 우려 국가로 전락=가계부채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익숙한 이슈가 아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987년 세계 1위 저축 강국에 등극한 후 2000년 벨기에에 밀릴 때까지 부동의 1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10년 사이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빠르게 하락했고 10여년 만에 최하위권까지 추락했다. 지난해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3.1%로 덴마크(-1.3%), 뉴질랜드(0.8%), 일본(2.9%) 등에 이어 네번째로 낮다.
빚이 빠르게 늘어난 데는 부동산 폭등과 폭락의 영향이 컸다. 집값이 급등하면서 저축보다 수익률이 좋은 부동산에 빚을 내 투자를 감행하는 사람이 늘었고 이후 집값이 떨어지자 빚에 갇힌 사람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형국이 됐다. 2002년 말 465조원 수준이던 가계부채는 지난 3ㆍ4분기 911조원으로 2배가 됐다. 2010년까지 가파르던 증가세가 지난해부터 안정된 추세에 접어들었지만 금융권의 연체율(1.91%)과 부실채권비율(1.27%)은 상승곡선을 타 여전히 불안하다.
◇사회불안 도미노 효과 우려=문제는 취약계층이다. 하위 20% 가구는 월소득(121만원)보다 월지출(156만원)이 35만원 많은 적자가구다. 연간 원리금상환액은 연간소득의 42.6%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들은 글로벌 경기가 위축되거나 내수가 둔화될 경우 직격탄을 맞아 채무불이행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가계부채를 '한국경제의 뇌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계부채가 소비위축→내수침체→서민경제 위기→사회불안으로 연결되는 도미노 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가계대출을 최전선에서 담당하는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경제 여건이 악화되면 단시간에 부실이 급증하면서 금융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고 공식 경고하기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소비부진 원인 중 하나로 가계부채를 지목하며 내수회복을 위해 가계의 재무건전성을 높이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은미 수석연구원은 "내수의 경기안전판 기능이 부실해지면서 경제 전반의 안전성이 흔들리고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점인 내수와 수출의 불균형이 더욱 커지고 있다"며 "소비부진이 장기화할 경우 2020년 잠재성장률은 0.6%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취약계층에는 과감한 재정투입 필요=김석동 금융위원장은 "금융 부문의 대책만으로는 어렵다"며 가계부채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금융 당국뿐 아니라 기획재정부ㆍ고용노동부ㆍ국토해양부ㆍ한국은행 등 관련 정부기관이 총동원돼야 한다는 의미다. 서민금융을 활성화시키고 가계부채 연착륙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일자리 창출과 물가 관리, 부동산시장 정상화, 유동성 등 거시경제적 여건이 함께 뒷받침돼야 가계부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가계부채 위기를 단순히 채무상환이 아닌 부동산 비중이 75%를 차지하는 가계자산을 재구성하는 기회로 보고 넓게 접근해야 한다"며 "주택시장의 구조적 한계를 개선하는 한편 자산 거래 활성화와 유동화를 지원하기 위한 조세정책을 함께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가계부채 연착륙을 위해 필요할 경우 취약계층에 재정 투입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용등급 7등급 이하 저신용자는 3월 말 현재 660만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250만명은 30% 이상의 고금리를 부담하고 있다.
저신용자를 위한 현행 서민금융체계는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서민계층에 대한 적정한 신용위험 평가모델도 없거니와 제2금융권의 경우 저신용층에 20~30%대 고금리와 함께 7~10%의 대출모집인 비용까지 부담 지우고 있다. 취약계층의 금융소외감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가 햇살론ㆍ새희망홀씨ㆍ미소금융ㆍ바꿔드림론 등을 통해 서민금융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전체 가계부채 대비 턱없이 부족한 규모에 창구마저 여기저기 분산돼 있다 보니 만성적인 초과 수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금융위기 당시 중소기업 대출에 대해 일괄 만기연장을 했듯 다중채무자ㆍ하우스푸어 등 취약계층의 가계부채에 대해서도 더 늦기 전에 특단의 대책이 동원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책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취약계층의 가계부채 문제는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슈"라며 "투입 목적과 결과를 면밀히 따져 저소득층을 타깃으로 재정을 적시에 투입한다면 투입 대비 효과가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