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십시오"에 DJ "康수석에 말하겠다"<br>환란해법 제시등 정책조언자로 든든한 10년원군<br>관료들 '이단아' 부정적 보고에 DJ 마음도 떠나
| 열대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혹한의 시베리아까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그린 삶의 궤적은 숱한 말썽에도 불구하고 신화(神話)로 불렸다. 한때 많은 사람들은 지구본을 손에 품은 그의 모습에서‘세계경영’을 읽었다. 그러나 이제 몰락한 신화의 주인공으로돌아온 그에게 국민들의 이목이 다시 한번 집중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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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우중 전 대우 회장. 20년지기인 그들은 누구보다 서로의 삶을 보듬어주고 응원해주는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도 환란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우가 패망하면서 두 사람이 맺어온 인연의 사슬은 녹슬어만 갔다. 당선 이후 김 전 회장을 웃음으로 반기는 김 전 대통령의 모습(좌)과 98년 11월 한중 경제인 오찬에서 두통으로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어루만지는 김 전 회장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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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대우 이렇게 해체됐다
"도와주십시오"에 DJ "康수석에 말하겠다"환란해법 제시등 정책조언자로 든든한 10년원군관료들 '이단아' 부정적 보고에 DJ 마음도 떠나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열대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혹한의 시베리아까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그린 삶의 궤적은 숱한 말썽에도 불구하고 신화(神話)로 불렸다. 한때 많은 사람들은 지구본을 손에 품은 그의 모습에서‘세계경영’을 읽었다. 그러나 이제 몰락한 신화의 주인공으로돌아온 그에게 국민들의 이목이 다시 한번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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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지난 80년대 중반 “천시(天時)와 인재(人才)의 만남이 오늘의 대우를 이뤘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만이 대우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멋진 제목을 단 김우중의 책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은 끝에 ‘분식회계 41조’라는 별칭이 대우와 김우중에게 따라붙었다. 천시가 항상 김우중 편은 아니었다. 적수공권의 상징에서 정경유착의 원조에 이르기까지. 김우중과 대우가 우리 국민에게 던져준 이미지는 혼돈 그 자체이다. 그러나 5년8개월 만에 고국 땅을 밟는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을 맞은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설 의무가 있다. 그것은 대우 그리고 김우중이 한국경제에서 갖고 있는 의미가 결코 일회성에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1998년 1월24일. 영하 10도를 넘보는 매서운 날씨였다.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 검은색 체어맨 한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백발의 김우중. 그가 아카디아에서 체어맨으로 차를 바꾼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다른 재벌들이 예정됐던 투자마저 모조리 취소하고 움츠러들 때 그런 분위기를 비웃기라도 했던 것일까. 김우중은 1,500억원의 지참금까지 은행에서 챙기며 쌍용자동차를 보기 좋게 인수하면서 내외의 이목을 다시 한번 끌었다. 그는 이날도 평택 쌍용차공장의 야전용 침대에서 새우잠을 잔 뒤 10년지기를 찾아온 것. 10년지기는 다름 아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였다. ‘대우식 외상경영’은 여전히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대중 당선자와 마주한 김우중 대우 회장. 김 회장은 80년 ‘서울의 봄’ 이후 ‘3김’ 중 유독 DJ를 정치적으로 후원해왔다. 김대중 당선자가 평민당 총재였던 80년대 후반에는 그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97년 대선 과정에서도 김우중은 DJ에게 누구보다 충실한 원군 역할을 해줬다. 당시 경제적으로 외로움이 컸던 DJ에게 김우옴맛揚?각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김우중의 오른 손에는 노란색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DJ가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봉투 속 A4용지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김우중식 묘책’이 들어 있었다. ‘500억달러 흑자론’과 제너럴모터스(GM)와의 50얼달러 규모의 합작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는 하나 DJ로서는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푼의 달러도 아쉬운 때였다.
관료들은 김 회장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500억달러의 25분의1에 불과한 20억달러 흑자만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다. 여기에다 GM이라는 세계 초일류 기업까지 끌어온다는 김 회장을 DJ는 한없는 신뢰했다. 김 회장은 기업들에 무역금융(외상수출)을 대폭 지원해 수출총력체제로 전환하면 적어도 300억달러 이상의 흑자는 올릴 수 있다고 대통령 앞에서 장담했다.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일까. 1년 후 한국의 무역흑자는 394억달러였고 김 회장의 예언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수출국 창고에는 국산차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었지만…)
DJ “金회장 못믿을 사람이군” 독대 거절
GM과 협상 결렬로 정치권 신뢰 잃어 회사채 발행한도 제한등 악재 잇달아
원군은 사라지고 돌아온 것은 냉소뿐…정치적 버팀목 이종찬 국정원장 사퇴
천용택 신임원장“대우는 안돼” 강경…99년8월25일 한시간만에 워크아웃결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우중 전 대우 회장. 20년지기인 그들은 누구보다 서로의 삶을 보듬어주고 응원해주는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도 환란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우가 패망하면서 두 사람이 맺어온 인연의 사슬은 녹슬어만 갔다. 당선 이후 김 전 회장을 웃음으로 반기는 김 전 대통령의 모습(좌)과 98년 11월 한중 경제인 오찬에서 두통으로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어루만지는 김 전 회장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김 회장은 어느새 DJ의 소중한 정책 조언자가 돼 있었다. 두 사람은 98년 6월에는 한 달에 3~4차례 이상이나 독대했다. 둘 사이가 깊어질수록 관료들의 입에서는 김우중에 대한 경고음이 큰소리로 터져 나왔다.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입에 단내를 내며 재벌개혁을 외치던 정통 관료들에게 김우중은 이단아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 없이 부채를 줄여도 모자란 판에 외상수출로 덩치를 키우겠다니. 김우중은 과연 연금술사라도 된다는 얘기인가. “부채도 자산”이라는 그의 강기(剛氣) 어린 어조는 관료들에게 ‘미치광이 놀음’으로 치부됐다.
김우중식 처방의 문제점과 대우의 자금사정을 담은 리포트가 수없이 청와대에 전해졌다. 김우중에게 관료들은 철없는 책상물림에 불과했지만 관료들에게도 역시 김우중은 세상 변한 줄 모르는 구세대 경영인이었다. DJ의 마음은 관료들에게 포위된 채 조금씩 김우중에게서 떠나갔다.
‘의도된(?)’ 공격이었을까. 정부는 7월22일 기업어음(CP) 발행한도를 규제한 데 이어 10월28일에는 회사채 발행한도까지 줄였다. “타깃은 대우”라는 루머가 급속히 시장에 떠돌았다. 설상가상의 형국. 98년 10월29일, 노무라증권은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are ringing for the Daewoo)’라는 보고서를 무기로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98년 12월16일 아침. 베트남 하노이 대우호텔 스위트룸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DJ와 이희호 여사, 김우중과 부인 정희자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 ASEAN 정상회담 참석차 베트남을 방문한 DJ. 뇌혈종 수술을 받은 지 불과 20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김우중은 모든 일정을 제쳐두고 하노이를 찾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라는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모처럼 찾아온 독대의 기회. 하지만 조찬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DJ는 짐짓 김 회장의 건강을 염려하는 발언을 이어갔지만 그의 목소리에 더 이상 정겨움은 없었다. DJ의 머리에서 김우중은 이미 ‘버려진 카드’로 변하고 있었다. 그래도 김우중에게 이 자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일주일 전 합의된 자동차-전자 빅딜은 그에게 위기의 돌파구였지만 이미 자금상황은 한계에 이른 터였다. 4조~5조원의 자금이 구멍날 위기에 처했다는 루머가 곳곳에 퍼졌다. 빅딜 상대편인 삼성의 금융계열사까지 자금회수에 나섰다는 소식은 불안한 시장을 부채질했다.
김 맛揚?입에서는 무겁지만 매우 직설적인 발언이 나왔다.
“무역금융이 안됩니다. 연불수출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DJ의 마음은 떠나 있었다. 통치권자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강봉균) 경제수석에게 말해보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강 수석과 김 회장의 갈등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있었다. 김중권 비서실장 역시 김 회장의 손을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관료들과 김 회장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우 몰락은 이미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김우중과 대척점에 서 있던 강 수석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은행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5개월 후인 99년 4월14일. 기자회견장에 나온 DJ의 발언은 간단했다.
“5대 그룹도 워크아웃될 수 있습니다. ”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갔다. 하루마다 만기가 돌아오는 기업어음(CP) 규모는 수천억원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만기 10일 이내의 자금도 5조원에 달했다. 자금위기가 심해지면서 김우중 특유의 정치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99년 5월. 불운은 연이어 몰려왔다.
김우중에게는 정치적 버팀목이 있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 경기고 동기동창인 이종찬은 김우중에게 정치무대와의 끈을 이어주는 ‘정치교사’이자 ‘우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노이 대좌 이후 자금난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김우중이 DJ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이종찬의 도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던 그가 그만뒀다. 정치적 동아줄이 끊어진 것이다.
이종찬의 바통을 이어받아 국정원장에 취임한 사람은 천용택이었다. 김우중에게 천용택은 껄끄러운 상대였다. 심하게 표현하면 저승사자와도 같았다. 경제 파트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들은 김우중에 대한 천용택의 강경론에 불을 지폈다.
“더 이상 대우는 안되겠습니다. 김우중 회장 처리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
이 시점 권력 상층부에서는 김 회장이 워크아웃 직전인 99년 8월12일 해외 미수금 회수 협상을 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출국한 것을 두고 자신의 경기고 동창이자 DJ와 가까운 사이인 무기중개상 조풍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た윤竪?했다.
김대중과 김우중. 이제 둘의 사이에는 더 이상 10년 넘는 우애가 존재하지 않았다. DJ는 여러 차례 독대 요청을 거절했다. 야당 시절부터 “김대중을 존경한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DJ에게 깊은 신뢰를 품었다던 김우중. 마지막 순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디찬 냉소뿐이었다.
피를 부르는 사각의 링에 쓰러진 김우중에게 더 이상 원군은 없었다. GM과의 질긴 대우차 매각 협상도, GM을 대체하는 그룹의 마지막 탈출구로 여겼던 삼성과의 자동차 빅딜도 구원의 씨앗이 될 수 없었다. 멸망하는 그에게는 GM과의 26년 인연, 이건희 삼성 회장과의 어울림, 희망의 줄기라며 소중하게 품어왔던 그 어떤 것도 패망을 재촉하는 도구로 변한 상태였다. 50억달러에 달한다며 김 회장이 줄기차게 되뇌었던 GM과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은 DJ에게 ‘김 회장은 못 믿을 사람’이라는 결정적 구실만 남겨줬다. 김 회장은 통치권의 신뢰라는 큰 자산을 잃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자신의 상처를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금융기관)들의 빚독촉이었다.
99년 8월25일 오후6시.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모인 은행장들은 한 시간여 만에 12개사의 워크아웃을 결의했다. 세계경영의 화려한 신화는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외줄자전거 타기를 하다가 추락한 서커스 단원, 곡예사 김우중은 날개 잃은 이카루스처럼 흔적을 태웠다.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전 김우중은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을 찾아 “살려달라”고 읍소했다. 이 위원장은 “재벌개혁은 펜스를 넓게 둘러친 뒤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같다”고 ‘재벌론’을 읊었다. ‘야생마 김우중’은 끝까지 길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의 긴 세계경영의 여정을 접은 뒤 해외에서 보낸 A4용지 두 쪽짜리 글을 통해 무상함만 전해왔을 뿐.
“자랑스러웠던 여정은 국가경제의 짐으로 남게 됐으며 우리의 명예는 날개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꿈과 이상 또한 가눌 수 없는 고독이 되어 여생의 반려로 남게 됐습니다.”(99년 10월25, ‘임직원과 가족 여러분께 드리는 글’)
입력시간 : 2005/06/1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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