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시그널의 대명사'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의회에서 한 말이다. 시장에 명확한 신호를 주는 게 오히려 독이고 모호한 화법으로 일관하다 허를 찌르는 결정으로 시장에 충격을 주는 게 세계 중앙은행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1990년대. 그린스펀 의장은 그 트렌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린스펀 의장은 "예측 가능한 신호를 달라"는 시장의 요구에 대해 자신의 말은 "건설적 모호성(constructive ambiguity)"이라며 계속 모호한 신호로 일관했다.
그런 그린스펀 전 의장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따라가는 모양새다. 지난 12일 기준금리를 사상 초유의 1%대로 깜짝 인하한 후 이 총재의 메시지는 다소 모호해졌다. 19일 경제동향 간담회를 앞두고 시장은 금리인하 후 첫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총재의 입에서 추가 금리인하 신호가 나올지 촉각이 곤두섰다. 하지만 아리송했다. 그는 전날 새벽에 열린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에 대해 "비둘기파적으로 보인다"면서도 "(미국의 금리전망이) 어찌 보면 불확실성은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앞부분에만 집중하면 한은이 추가로 금리를 내릴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지만 뒷부분은 금리인하가 어렵다는 해석이 가능한 이중의 신호다.
24일 경제동향 간담회 역시 마찬가지다. 이 총재는 "기조적으로 우리 경제가 성장할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금리인상, 국제유가 등 불확실성이 크다"고 말했다. 기조적으로 우리 경제가 성장한다는 앞부분만 놓고 보면 금리 추가 인하는 물 건너간 듯한 뉘앙스다. 하지만 경제상황이 단기적으로 불확실성이 크다는 뒷부분에 방점을 찍으면 추가 인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한은의 한 고위관계자는 "경제상황이 안갯속에 갇힌 형국이어서 한은조차도 정확한 분석 및 운신의 방향을 가늠하지 못할 때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 시장이 잘못된 방향으로 쏠리게 하는 것보다 모호한 메시지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 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총재가 20여년 전 그린스펀을 답습하고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한 관계자도 "금리 동결·인하의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경기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며 "결국 한은이 경제지표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주고 있다고 해석하면 맞다"고 덧붙였다.
다만 금리인하 후 이 총재의 흐릿한 메시지는 그동안 분명한 신호와 시장소통을 강조한 지론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많은 말을 해서 시장에 여러 메시지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김중수 전 총재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던 이 총재가 전임 총재와 유사한 궤적을 그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총재는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하지 않겠다"며 시장과 명확한 소통을 강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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