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삼성전자 디자이너였던 케빈 리(한국명 이상욱·사진)가 최근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삼성디자인아메리카(SDA)에서 지난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제품 전략과 사용자경험(UX)을 담당했다. 현재는 비자카드에서 카드 디자인 총괄로 재직 중이다.
리는 삼성전자의 디자인 혁신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 것도 아니고 삼성이 훌륭한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데 인색해서도 아니다"라며 "기업 문화와 경영진, 구조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디자이너 위에 군림하려는 경영진과 관료제 보고 체계가 원래의 아이디어를 사장시키고 '의미 없는(meaningless)' 제품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에 본격 채택하기 시작한 메탈 케이스는 몇 년 전 윗선에서 거부당했던 아이디어가 부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행에 실패한 '갤럭시S5'는 성능면에서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뒷면에 촘촘히 뚫은 천공(穿孔·펀칭) 디자인 때문에 '반창고'라는 조롱을 면치 못했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는 디자인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세계적 디자인 회사인 '탠저린'의 공동대표였던 이돈태씨를 최근 디자인경영센터 글로벌디자인팀장으로 전격 영입했다.
디스플레이·반도체 등 각종 하드웨어 분야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는 삼성전자는 제품 디자인이나 UX와 같은 '소프트 파워'는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애플과의 스마트폰 경쟁에서 발목을 잡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문가들은 삼성뿐 아니라 한국 기업 전반에 만연한 관료제적 특성이 디자인과 같은 창의성을 요구하는 분야의 혁신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캐나다 아이비 경영대학원의 린 엘메이 교수는 "삼성처럼 위계적·집단적 사고방식을 갖춘 조직 환경에서 디자이너들은 수차례 거듭되는 보고를 거쳐야 하고 경영진은 수익성을 입증해야 한다"면서 "이는 삼성전자 각 제품마다 수십 종씩 변종이 나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과거 디자인 혁신을 통해 시장 주도권을 거머쥔 사례가 존재하는 만큼 혁신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윤부근 소비자가전(CE) 부문 대표가 개발을 주도했던 보르도TV는 곡선 모서리와 와인을 연상하게 하는 붉은 색상으로 격찬을 받으며 삼성전자가 TV 분야 1위에 오르는 발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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