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 국제천문연맹(IAU) 산하 소행성센터(MPC)는 '2002DB1'이라는 임시번호만 있던 한 소행성에 대해 정식명칭을 승인했다. 이 소행성의 새로운 이름은 '이원철(Leewonchul)'. 소행성에 한국인의 이름이 붙은 경우는 그동안 꽤 있었다. 한국인의 이름이 붙은 소행성은 '최무선', '장영실', '허준', '홍대용', '김정호' 등이다. 이들은 모두 역사상 널리 알려진 위인들이다. 이에 비하면 이원철은 상대적으로 좀 낯선 이름이고, 게다가 역사의 위인들에 비해 작고한지 얼마 되지 않은 현대사의 인물이다. 과연 이원철은 어떤 사람이기에 별에 이름이 붙었을까? 우남(羽南) 이원철은 보성중학교와 오성학교,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수학물리과(數學及物理科)를 1회로 졸업했다. 그리고는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1921년에 미국으로 가서 1년 만에 앨비온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 뒤 이원철은 루퍼스가 천문학교수로 있던 미시간 대학으로 옮겨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를 시작했고 1922년 이학석사를, 1926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였다. 이원철의 박사학위 논문은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분광학적 관찰과 분석을 통해 그 별이 맥동변광성임을 밝힌 것. 맥동변광성은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변광성의 한 유형으로서, 별 자체가 스스로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며 밝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원철의 발견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연구 과제였던 섀플리의 맥동설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그는 또 미시간 대학 천문대에서 31.5인치 반사망원경과 프리즘 분광기를 이용해 71회의 분광학적 관측결과를 얻었고, 이를 세밀하게 분석·계산했다. 이원철의 발견은 미국천문학회 학술회의와 학술 잡지에 실렸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바로 귀국해서 모교 연희전문의 교수로 부임했다. 이미 그는 미국 유학 시절 거둔 업적으로 인해 유명인이 된 상태였다.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대상이던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이야기가 당시 잡지 <삼천리> 등에 '원철성'으로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그는 식민지의 설움을 겪던 우리 민족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을 안겨준 인물이었으며, 그가 미국 한복판에서 서양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구 성과를 거둔 사실은 민족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이원철의 연구는 안타깝게도 박사학위 이후에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에서 하던 천문학 연구를 계속할만한 장비가 없었기에 그는 연구 대신 교육을 통해 학문적인 열정을 쏟아냈다. 이러한 이원철은 모국에서 사실상 국내에 유일하다시피 한 천문학 강좌를 이끌었으며, 연희전문 옥상 천문대에 설치된 15cm 굴절망원경으로 학생들에게 천체 관측도 지도했다. 모두가 1930년대 이전에 이루어진 일로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의 소중한 기록들이다. 1950년대 들어서는 인하공과대학 설립과정에 참여하여 초대학장으로 10여 년간 재직하며 신설대학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동시에 YMCA의 재단 이사와 이사장도 역임하는 등 사회 교육 활동에 많은 기여를 하다가 만년에는 집과 토지 등 자신의 전 재산을 YMCA에 기부하여 마지막까지 사회봉사를 몸소 실천했다. 소행성에 붙은 그의 이름이야말로 실로 영원히 기억될만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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