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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쓰는 법이야기] <11> 가망도 없는데 항소하는 사람들

난치병 고치려 큰병원 찾는 심정…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는 착잡


하태헌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쓰는 법이야기] 가망도 없는데 항소하는 사람들 난치병 고치려 큰병원 찾는 심정…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는 착잡 하태헌 서울중앙지법 치열하게 다툰 1심 재판이 끝나고, 재판에 진 당사자가 불복을 한 2심 재판을 담당하다 보면 1심 재판 때와는 다른 면이 많다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판결을 선고하는 사건 중에는, 판사도 신이 아닌 이상 도저히 진실을 발견하기 어려워 스스로 내린 결론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고, 담당 판사의 가치관이나 판단 기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는 사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소심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거나, 다른 가치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에는 1심과 다른 결론이 날 가능성이 언제라도 있기 때문에, 항소를 할 수 있는 소송당사자의 권리는 불합리하게 제한당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항소기록을 보다 보면, 간혹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도대체 이 사건에서 이 당사자가 왜 항소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를 종종 만나곤 한다. 항소를 해도 법리상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사건인 경우, 혹은 만일 항소를 했다가 상대방이 맞받아 함께 항소하거나 반소라도 제기하면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 경우까지 무차별적으로 항소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생각보다 항소 비용이 만만치 않고, 항소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받아야 하는 심리적인 부담까지 고려할 때, 말릴 수만 있다면 제발 항소하지 마시라고 말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 항소를 하는 사람들 가슴속에 얼마나 시린 억울함이 사무쳐 있기에 자신의 의견을 재판부가 다시 한번 들어주기를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법조인의 길로 들어서기 전 대학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던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종종 있었다. 도저히 치료가 힘든 병을 가지고 지방 의원과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최종적인 진단을 받아보고자 서울의 큰 대학병원까지 오게 되는 환자들. 물론 그 중에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만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다 해봤으니, 이제 여기서도 못 고친다면 이 병은 안 되는 병이구나' 하며 혹시나 하는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 있을 같아 지방병원 의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리를 해서 올라오게 됐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환자들을 바라보는 지방의원의 의사 심정이 아마도 이길 수 없는 사건을 재판한 1심 판사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 증거가 없거나 법리상 어쩔 수 없이 패소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응어리를 도저히 풀어낼 길이 없어, 경력이 많은 상급심 판사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뭔가 다른 결론을 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마지막 모든 절차까지 다 밟아보려는 당사자들의 절박한 심정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이라면 내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환자들의 심정과 비슷한 것은 아닐는지? 또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최종적인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야만 맘 편히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소송 당사자들의 심정 역시, 고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용하다는 의사의 진료를 한번만이라도 받아보고 싶은 환자들의 심정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소송에 승복하지 못하고 끝까지 달려드는 당사자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용한 의사라도 고치지 못할 병이 있듯이 누가 재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소송이 있다. 마지막 절차까지 모두 밟아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에는 환자든 소송당사자든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가 너무나 고통스럽기도 하다. 길지 않은 법원 경력에서 유난히 항소, 항고 업무를 많이 맡고 있는 덕에, 오늘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사건인데도 원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복한 사건을 처리하며 이 당사자는 왜 항고를 했을지 잠시 생각해 본다. 결국, 1심 결론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항고를 기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환자를 두고 가슴 아파하는 의사처럼 소송에 매달리는 당사자에게 초겨울 칼바람보다 매서운 패소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의 마음도 그저 착잡하기만 하다. 그들은 물론이고 소송 상대방까지 치러야 할 고통을 생각할 때, 이제 그만 승복하고 마음을 비우기를 바라는 것이 사건을 처리하는 판사의 그저 사무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 이글은 본지 홈페이지(hankooki.com)뿐만 아니라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seoul.scourt.go.kr) ‘법원칼럼’을통해서도 언제든지 볼수 있습니다. 입력시간 : 2008/01/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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