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연예인을 꿈꾸고 연예인을 갈망하는 시대. 이제 아무도 그들을 ‘딴따라’로 부르지 않는다. 부모들이 발벗고 나서 자녀들을 연기학원에 등록시키고, 스타를 꿈꾸는 아이들은 제 발로 기획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들이 스타가 된다는 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어렵기만 하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오늘도 ‘제2의 고아라’ ‘제2의 보아’를 꿈꾸며 연습실에서, 오디션장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스타의 등용문, 베를린 장벽보다 높고 험하다는 TV드라마 공개 오디션 현장을 찾아갔다.
■ 200대1 경쟁률? 자신있어요!
지난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신관 5층 국제회의실. 언뜻 봐도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수백명의 아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이 날 이 곳에선 청소년드라마 ‘반올림# 3’ 공개오디션이 열렸다. 제목 그대로 ‘공개오디션’. 사전접수도, 예심도 없다. 말 그대로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은 청소년이라면 아무나 방송국에 와서 오디션을 볼 수 있다.
이 날 모인 아이들은 총 223명. 드라마상 나이는 17살(고1)이지만, 오디션엔 15살부터 대학까지 졸업한 25살까지 다양한 응시자들이 몰렸다. 말이 공개 오디션이지, 응시자 중 90% 이상은 잡지모델, CF모델, 케이블방송VJ, 단역배우, 보컬그룹 멤버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절반 가량은 이미 연예기획사 소속으로 매니저까지 대동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아이들이라지만 뽑힐 주인공은 단 1명. 조연까지 쳐도 10명 남짓을 뺀 나머지 아이들은 빈 손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도 대기실에서 긴장한 표정을 한 아이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기자가 한 아이에게 “자신 있냐”고 물었을 땐 주변에 있던 10여명의 아이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자신 있어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정도 적극적인 모습까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화장에 속지 않는 냉정한 심사위원
오디션이 시작됐다. 응시생 5명이 1조가 돼 PD, 작가로 구성된 8명의 심사위원 앞에 섰다. 각자 이름과 나이, 경력을 말한다. 이제 자신의 끼를 보여주는 시간.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1분 남짓. 그 1분 안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에 띄어야만 한다.
대기실에서 그토록 당당했던 아이들이지만 막상 심사위원 앞에 서니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한 응시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말을 얼버무리자 “발음 제대로 하라”는 PD의 차가운 지적이 터져 나온다. 더 긴장한 응시생은 이름조차 더듬거리면서도 애써 밝은 표정을 잃진 않았다.
가수 뺨치는 노래실력과 연기는 기본. 대부분 학원이나 개인교습을 통해 연기수업을 받은 아이들인 탓인지, 노래와 연기는 다들 판에 박은 듯 엇비슷하다. 멋진 가창실력에 한 작가의 지적. “여기는 가수 오디션이 아니에요.”
장기를 보여줄 순서가 왔다. 개중엔 밸리댄스부터 검도, 축구공 드리블까지 보여주는 아이도 있다. 한 아이가 “개인기를 보여 드리겠다”며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하지원, 조인성 흉내를 우스꽝스럽게 내자 얼음장 같던 오디션장은 한순간에 웃음바다로 변한다.
또 다른 아이는 “유도 낙법을 보여주겠다”며 무대를 굴렀지만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심사진들의 웃음소리보다 실수한 아이의 비명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진다.
멋지게 머리모양을 만들어 온 아이들에겐 여지없이 “이마를 까 보라”는 주문이 나온다. 이마를 덮은 머리를 올리자 사뭇 다른 얼굴모습이 비춘다. 노련한 심사진들은 절대로 화장발, 머릿발에 속지 않는다.
■ "그냥 흘려보낼 아이들이 없다"
오후 1시에 시작한 오디션은 4시가 지났는데도 아직 절반이 채 끝나지 않았다. 잠시 휴식시간. 오디션 심사에 참석한 ‘반올림#‘의 최세경PD는 “그냥 흘려보낼 만한 아이들이 없다”며 응시생 수준에 만족한 모습이다.
“사실 아이들이 보여주는 연기나 특기는 다 엇비슷해요. 중간중간 비치는 자연스런 모습에서 차이가 많이 나죠.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도 자신 있게 무대를 지배하는 응시생들이 돋보여요. 그만 하라고 할 때 특기 하나만 더 보여주겠다며 나서는 아이들이 눈에 띄죠.”
웬만큼 끼가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기획사에 소속돼 오디션이 필요 없을 법도 하지만 최PD는 “그래도 공개오디션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청소년 드라마인 만큼 아이들에게 열린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어요. 고아라만한 아이가 혜성처럼 등장할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이런 오디션장에서 의외로 신선한 마스크를 찾을 수 있어요.”
■ "아이가 원하면 시킨다" 열성 부모들
오디션은 다시 시작됐다. 대한민국에서 예쁘고 잘 생겼다는 아이들은 다 모였다는 드라마 오디션장에 난데없이 얼굴의 반은 가린 뿔테안경을 쓴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원래부터 안경을 쓰고 다니냐”는 질문에 “튀어 보려는 설정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다시 한 번 대기실을 나가보니 꼭 예쁜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여드름이 얼굴을 한 가득 덮은 꺼벙한 남자아이부터 엽기적인 표정을 연습하는 아이까지 드문드문 모여 있다.
많진 않지만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도 있다. 딸 오디션만 벌써 네 번째 쫓아왔다는 아이 엄마는 “될 때까지 밀어주겠다”며 아이의 등을 두드린다. “유치원 때부터 유난히 우리 딸애가 도드라졌어요. 주변에서 탤런트 시키면 잘 하겠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죠. 몇 달 전에 CF모델로도 나섰어요. TV에 나오는 딸아이 얼굴이 얼마나 예쁘다고요.”
구석에서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는 한 아이엄마가 눈에 띈다. 고2 올라가는 아들과 함께 왔다는 아이 엄마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아이가 몇 달 전부터 연기자가 하고 싶대요. 성화에 못 이겨 2주 전에 연기학원에 등록시켜줬고, 오늘 오디션까지 따라왔죠.”
“날고 기는 애들이 참 많다”며 말을 건네는 기자에게 아이 엄마는 한숨부터 내쉰다. “걱정이 왜 안 되겠어요. 여기 모인 애들을 보세요. 다들 우리 애보다 예쁘고 잘 생겼잖아요. 혹여나 허황된 생각에 헛바람이라도 들까 봐 걱정되죠.”
그래도 오디션은 잘 됐으면 좋겠단다. “가꿔지지 않은 모습에서 색다른 좋은 면을 발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이 아빠는 왜 자꾸 어려운 것만 시키냐고 핀잔을 줘요. 그래도 아이가 이렇게 하고 싶어하는데, 기회는 만들어 줘야 아이 인생도 행복해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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