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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풍’ 휩싸인 10대 청소년들
입력2004-03-02 00:00:00
수정
2004.03.02 00:00:00
신재연 기자
`쌈풍`(싸움 바람)이 분다. 학교 내에서 학교 밖에서, 중ㆍ고교생은 물론 초등학생도, 남학생에서 여학생까지,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로마시대 검투사 마냥 누가 더 센지 승부를 가리기 위한 무의미한 `싸움 파티`가 계속되고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짱`은 영웅으로 통한다. 더구나 힘과 권력의 상징인 쌈짱은 짱중의 짱이다. 청소년들이 왜곡된 영웅상에 다가가기 위해 오늘도 주먹을 휘두르며 연습에, 그리고 실전에 몰두하고 있다. 싸움이 마치 스포츠의 일종처럼 자리잡고 있다.`쌈에 의한, 쌈을 위한, 쌈만의…`
서울 S고 1학년 중에서 쌈짱으로 통하는 김모(16)군은 최근 P고 1학년 최모(16)군으로부터 이메일로 결투 제의를 받았다. “누가 더 센가 겨뤄보자”가 요지. 김군은 약속장소와 참관인 명수를 정한 뒤 최군을 만났다. 으슥한 장소로 가서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서로 주먹을 교환했다. 최군이 코피를 흘리며 등을 돌리자 심판들에 의해 싸움이 끝났다. 이 결과는 곧 인터넷을 통해 전파됐다.
김군이 학교 짱에 오르기까지 주먹 꽤나 쓰는 친구들과 숱한 승부를 겨뤘고 이를 위해 실전과 다름없는 맹연습을 했다. 연습상대는 인터넷을 통해 구한 뒤 격투기용 글러브를 끼고 싸움판을 벌였다. 김군은 “남자답고 멋있잖아요”라며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내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서고, 승전보가 알려지면 친구들의 대접도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고 싸움을 자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 K중 3학년 이모(15)군은 같은 반 친구 김모(15)군과 `맞장 뜨기`(일대일로 겨루기)를 했다. 이군의 눈 주위가 찢어지면서 싸움은 끝이 났고, 이군은 병원에서 3바늘이나 꿰맸다. 이군은 “당하고만 있으면 영원히 놀림거리가 되기 때문에 질 줄 알면서도 오히려 살아 남기 위해서 싸움에 응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청소년 사이에 싸움은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순위를 가리기 위해서 싸우고, 사소한 시비에도 해결책은 싸움뿐이다.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으면 왕따 신세를 면키 어렵다. 주로 약자에 속했던 중학생 최모(15)군도 인터넷 싸움 동호회에 가입, 선배들에게 하루 2~3시간씩 킥복싱을 배우는 등 맹연습을 계속했다. 아침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감고 40여분간 동네를 돌며 힘을 길렀고 실전 경험도 쌓았다. 최군은 “맞기만 할 땐 몰랐는데 힘을 기르고 기술도 배웠더니 이제 싸우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최군은 반에서 `짱급`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쌈풍은 초등학생과 여학생에게도 불고 있다. 최근 한 인터넷 카페 회원의 주도로 열린 실전연습에는 여학생 7명도 참가했으며 이들도 남학생과 같은 방식으로 싸움판을 벌였다. 한 여중생은 인터넷 게시판에 “여자들은 싸움을 아무리 잘해도 상대방에게 머리카락을 잡히기 마련이라 머릿결이 상할까봐 걱정”이라며 “머리카락을 잡히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질문도 띄워놓았다.
쌈풍 부추기는 사회문화
TV와 영화, 인터넷 케이블 TV가 쌈풍의 근원지다. 연일 이종격투기 K1 등 격투기 중계가 방영되고 있으며 인기리에 개봉된 국내 영화도 학생들의 싸움을 집중 조명하거나 싸움을 미화한 내용 일색이다. 학부모의 왜곡된 보호본능도 쌈풍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쌈풍을 부채질하는 것은 인터넷. 싸움과 관련된 수십개의 각종 사이트가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다. 싸움의 전략을 공유하고 서로의 연습상대도 구해 `그들만의 리그`를 벌인다. 한 카페는 회원 수만도 수만명에 이른다. 싸움의 각종 비법과 발차기 주먹공격 등 기본적인 내용이 제시돼 있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또 정신자세 편에서는 `어디를 공격할 것인가` `적의 눈을 보라` `동정을 구하지도 베풀지도 마라` `싸움을 할 때는 짐승이 되고 적을 짐승으로 간주하라` 는 식의 섬뜩한 내용도 올라와 있다.
학교 밖에는 태권도 유도 권투 검도 등 전통적인 격투기 도장 외에 킥복싱(태국) 무에타이(태국) 카포에라(브라질) 등 외국에서 건너온 무술도장들도 속속 문을 열고 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자기 보호를 위해 보낸다고 하지만 오히려 학생들의 폭력성향이 커지는 부작용도 있다. 검도 학원에 다니는 K초등학교 5학년 이모(11)군은 “전학을 왔더니 다른 아이들 텃세가 심해 싸움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학원에 다니게 됐다”며 “부모님은 남한테 맞지 않을 정도만 배우라지만 내가 먼저 때리지 않으면 당한다”고 말했다. 킥복싱 학원을 운영하는 모 관장은 최근, 2개월새 킥복싱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이 배로 늘었다”며 “많은 학생들은 자기 단련을 위해 학원을 찾는 건지 격투기술만 연마하려는 건지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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