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1984년 9월6일 만찬에서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 양국 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식민지배의 상징적 존재인 일왕이 우리나라 관련 과거사에 대해 유감을 표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외교부가 30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우리 정부는 국민감정 등을 감안해 과거사에 대한 일왕의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일본 정부와의 교섭에 임했고 일본 정부가 이러한 입장을 수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1984년 1월 우리 정부는 관계부처회의를 통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일본 총리의 1983년 공식 방한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전 전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추진하는 '무궁화 계획'을 수립했다. 이원경 외무부 장관은 같은 해 2월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주한 일본대사를 별도로 만나 이 계획을 공식 통보했다.
양측은 전 전 대통령의 방일 시점을 9월6~8일로 정한 다음 방문 의제로 일왕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정부는 '무궁화 계획 대일 교섭 지침'에서 일왕의 과거사 반성 문제에 대해 "방일의 대전제이며 한일관계 미래상 정립의 전제"로 판단하고 "국민감정 등을 감안해 최대한 강한 어조로 반성을 확보해야 방일 자체에 대한 국민의 납득을 구할 수 있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이에 일본은 일왕의 과거사에 대한 언급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일왕의 발언을 외교적 교섭사항으로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는 '품위를 유지하는 선'으로 정했다.
우리 정부는 전 전 대통령의 방일을 일주일 정도 앞둔 시점에서도 일본이 일왕의 과거사 관련 발언 내용을 통보하지 않자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오면 국내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비공식으로 조속히 발언 내용을 통보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은 전 전 대통령의 국빈방문 일정이 시작되기 전날 일왕의 만찬사를 우리 정부에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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