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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놀랄 꿈의 기술을… 한국서 일 냈다
전자현미경으로 '액체 관찰' 기술 개발■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이정용 KAIST 교수'꿈의 소재' 그래핀 이용해 원자단위 화학작용 분석 가능세포생물학 발전 큰 기여… 나노소재 등 개발에도 청신호
박윤선기자 sepys@sed.co.kr
대전광역시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 연구실에서 이정용 교수 연구팀 소속 연구원이 전자현미경으로 물체를 관찰하고 있다. 이 교수는 전자현미경으로 액체와 기체를 관찰할 수 있는 기법을 개발했다. /사진제공=한국과학기술원
물과 수증기는 안 되고 얼음은 되는 것이 뭘까. 답은 바로 '전자현미경 관찰'이다.
전자현미경은 원자를 볼 수 있는 높은 배율의 현미경이다. 물 한 방울을 지구라고 할 때 물방울 속의 원자는 야구공에 불과한 아주 작은 크기다. 이처럼 작은 원자의 배열 순서까지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전자현미경 덕에 과학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자현미경에도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고체만 관찰할 수 있고 액체나 기체는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70%를 차지하는 것도, 지구의 70%는 덮고 있는 것도 '물'이지만 첨단 과학의 시대인 21세기에도 액체 속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는지 눈으로 확인된 적이 없는 셈이다.
이 같은 전자현미경의 단점이 우리 기술진에 의해 극복됐다. 이정용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자현미경으로 액체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 교수는 액체가 증발되지 않도록 투명한 막으로 한 겹 둘러싸는 간단한 원리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했다. 이 교수는 휘어지는 휴대폰을 가능하게 할 신소재로 주목 받는 '그래핀'을 이용했다. 그래핀은 연필의 소재인 흑연에서 떼어낸 얇은 막으로 내구성이 강하면서도 얇고 투명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같은 방법을 이용하면 기체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엿볼 수 없었던 세계 드디어 열렸다=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은 크게 고체ㆍ액체ㆍ기체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제껏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고체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액체를 관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전자현미경의 원리 때문이다. 전자현미경은 시료에 전자빔을 쏘고 이 상을 확대해 투영한다. 전자의 흐름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자가 공기에 부딪히지 않도록 장치 내부를 진공으로 한다. 진공 상태이기 때문에 기체는 존재할 수 없고 액체는 바로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액체는 물론 액체가 포함된 시료는 건조시키거나 얼리지 않는 한 관찰이 불가능하다.
액체를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과학계의 커다란 맹점(盲點)이었다. 동식물의 모든 세포는 수분을 포함하고 있고 배터리나 부식ㆍ도금 등 다양한 화학 작용도 액체와 고체 사이의 반응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엿볼 수 없던 액체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면 많은 것은 달라진다. 세포의 75%가 수분으로 구성돼 있는 만큼 우선 바이러스학ㆍ종양학ㆍ신경과학ㆍ세포생물학과 같은 생물학과 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액체 속에서 이뤄지는 각종 화학작용도 원자 단위의 분석이 가능해져 새로운 나노 소재 개발과 고성능 배터리 개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그래핀의 무한 응용…액체 관찰을 현실로=일명 '꿈의 소재'라고 불리는 그래핀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에서 스카치테이프로 분리해낸 물질이다. 두께는 100억분의2m 정도로 엄청나게 얇으면서 투명하고 물리적ㆍ화학적 안정성도 높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래핀은 앞으로 구부릴 수 있는 휴대폰이나 전자종이에 활용될 수 있는, 한마디로 유망 신소재다.
이 교수 역시 강하고도 투명한 그래핀의 특징을 이용해 세계 최초로 액체를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교수는 그래핀과 그래핀 사이에 갇힌 금 나노입자가 녹는점 이상의 온도에서도 안정적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그래핀 사이에 액체를 넣어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래핀은 초고진공 투과전자현미경 안에서 액체가 증발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밀봉할 수 있었고 두께도 탄소 원자 한 층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관찰하려는 시료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실제로 연구팀은 새로운 액체 관찰 방법을 통해 액상 백금용액을 두 겹의 그래핀에 밀봉해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이 과정에서 나노 입자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밝혀냈다. 그동안 나노 입자가 뭉치는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었다. 나노 입자끼리 뭉칠 때는 특정 면과 면이 닿아야 접합이 되는데 첫 번째 가설은 두 개의 나노 입자가 충돌을 일으킨 후 회전하면서 특정 면과 면이 달라붙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면과 면이 마주보고 있는 나노 입자만 충돌해 융합한다는 것이었다. 관찰 결과 특정 면과 면이 마주보고 있는 나노 입자만 충돌해 융합한다는 것을 관찰ㆍ증명할 수 있었다.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입자는 충돌하더라도 서로 달라붙지 않았다.
◇기체 관찰도 이론상 가능=액체 시료 제작에 적용했던 그래핀 기술을 그대로 적용하면 기체 자체 또는 기체를 포함하는 시료를 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교수는 "기체는 원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전자현미경으로 보기 힘들다"며 "기체 속에 있는 원자의 숫자를 줄이는 과정을 거쳐 그래핀 사이에 넣으면 이론상 관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액체와 기체를 원자 단위로 관찰할 수 있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지금은 암을 세포 수준에서 분석하지만 세포 내에서 원자가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암은 물론 각종 질병의 근본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전기자동차에 사용되는 배터리도 지금은 반응을 시켜본 후 얼마나 성능이 좋은지 관찰하지만 전해액을 원자 단위로 분석해 반응 원리를 알아내면 향후 고성능 배터리 개발의 기초를 닦을 수 있다.
지금까지 고체 상태의 연구가 주를 이뤘던 나노 결정 연구도 이번 연구 성과를 통해 나노 크기의 액체나 기체를 그래핀으로 밀봉해 제작하는, 나노액체ㆍ나노기체를 제작할 수 있게 됐다. 그 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과학 연구 분야가 생긴 것이다. 신생 학문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응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나노 고체가 활용되는 것처럼 흡수가 더욱 빠른 약이나 신소재 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
이 교수는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액체와 기체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과학 현상을 원자 단위로 규명해 우리 생활을 더 편리하거나 이롭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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