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Watch] 불황의 경제학… 가전·자동차 소비 양극화
"벤츠 S클래스 정도는 돼야지" vs "미니 세탁기도 좋기만 하던데"700만원대 TV·냉장고 인기… 싱글 늘며 소형가전도 잘팔려대형 프리미엄·실속형으로 기업 마케팅도 차별화 추세
성행경·김현상기자 saint@sed.co.kr
지난주 말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롯데백화점 잠실점 8층의 생활가전 매장. 국내외 유명 가전 브랜드들이 빼곡히 자리한 매장들 사이로 찬란한 화질을 뽐내는 대형 초고해상도(UHD) TV와 900ℓ를 훌쩍 넘는 냉장고들이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함께 쇼핑 나온 중년 부부는 잠시 떨어져 남편은 UHD TV 앞에서, 아내는 냉장고 앞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한다. 이들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전제품의 가격은 TV가 600만원, 냉장고는 700만원이 넘는다. TV와 냉장고를 모두 구매하면 웬만한 소형차 한 대 값과도 맞먹는다.
롯데백화점 잠실점 삼성전자 매장의 김경수 매니저는 "매장을 찾는 고객 대부분이 1,000ℓ가 넘는 대용량 냉장고와 65인치 이상의 대형 커브드 TV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지난해와 비교해 고가의 프리미엄 가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면서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비쌀수록 잘 팔리는 가전제품=장기화된 경기불황과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소비심리 위축이 우려되는 상황이지만 고가의 프리미엄 가전시장에서만큼은 전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실제로 롯데백화점은 올 1~5월 고가의 프리미엄 TV와 냉장고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50%, 180%나 신장했다. 특히 프리미엄 TV의 경우 6월 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수요가 폭증하며 5월 들어서만 무려 556%나 매출이 늘었다.
국내 가전업계도 올해 들어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들을 앞다퉈 쏟아내며 프리미엄 가전시장 규모를 점차 확대해나가고 있다. LG전자는 2월 950ℓ의 대용량 냉장고인 '더블 매직 스페이스'를 600만원대에 내놓으며 프리미엄 냉장고 경쟁에 불을 지폈다. 이에 질세라 삼성전자는 3월 '슈퍼 프리미엄'이라는 콘셉트를 내건 냉장고 '셰프 컬렉션'를 출시했다. 셰프 컬렉션의 한 대 가격은 최소 589만원부터 최고 739만원에 달한다.
TV도 고가의 대형 프리미엄 제품들이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선보인 UHD TV는 화면이 오목하게 휜 커브드 제품이 평면 제품보다 100만원 이상 비싸지만 판매비중은 압도적으로 높다. 또 커브드 제품 내에서도 65인치(790만원)와 55인치(590만원)의 판매비중이 8대2에 달할 만큼 고가의 대형 모델에 대한 선호도가 독보적이다. LG전자 대형 TV의 판매량도 급증하는 추세다. 1~4월 65인치 이상 대형 TV의 국내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400% 이상 크게 늘어났다.
이 밖에 삼성전자 드럼세탁기 '버블샷3'의 경우 올해 들어 17㎏ 이상 대용량 제품의 판매비중이 60%까지 높아졌으며 프리미엄 청소기 '모션싱크'도 월평균 판매금액이 전년보다 57%나 늘어날 정도로 인기다.
◇의(衣)·식(食)·차(車)도 프리미엄 전성시대=이 같은 현상은 비단 가전업계만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11월 말 출시된 메르세데스벤츠의 최상위 모델인 '뉴 S클래스'는 아직까지 물량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다. 출시 이후 약 5개월간 모두 2,351대가 팔렸으며 아직 출고되지 않은 계약물량만 3,000대가 넘는다. S클래스의 한 대 가격은 최소 1억2,000만원에서 최고 2억5,000만원을 호가한다. 대당 가격이 2억~5억원에 달하는 럭셔리카의 대명사 '벤틀리' 역시 올해 1~4월에만 111대가 팔려나갔다. 지난해 전체 판매량이 164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가히 폭발적인 성장세다. 이 밖에 BMW 7시리즈, 아우디 A8 등 프리미엄 모델의 판매도 급신장하며 올해 1~4월 수입차시장에서 가격 1억5,000만원 이상의 초고가 차량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우리가 입고 먹고 마시는 의식 분야에서도 프리미엄 제품 선호현상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롯데백화점 명품관인 본점 에비뉴엘의 올 1~3월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9% 증가하며 백화점 전체 매출 신장률(4.2%)을 압도했다. 같은 기간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의 명품 매출도 22.3% 늘어나며 역시 전체 신장률(8.3%)을 크게 앞질렀다.
먹거리도 예외는 아니다. 1~3월 롯데마트의 일반 냉장주스 매출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34% 줄었지만 이보다 3배가량 비싼 유기농 냉장주스의 매출은 오히려 24%나 증가했다. 참기름 역시 해외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50% 넘게 매출이 줄어든 반면 값이 3배 정도 비싼 국산 참기름은 6배나 늘어났다. 이에 힘입어 주로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을 판매하는 백화점 내 식품관 매출도 백화점 전체 매출 성장률을 앞지르고 있다.
◇작지만 실용적인 소형 가전도 인기=더 크고 더 비싼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 패턴 속에서 작지만 실용적인 가전제품을 찾는 손길도 늘고 있다. 동부대우전자가 2012년에 출시한 3㎏ 용량의 벽걸이 드럼세탁기 '미니'는 기존 15㎏ 드럼세탁기 대비 6분의1 크기에 가격도 저렴해 월 2,000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지난해 누적판매 4만대를 돌파했다. 지난해 7월에 선보인 150ℓ 용량의 소형 콤비냉장고 '더 클래식(54만9,000원)'도 지금까지 1만대 넘게 팔려나갔다. 이 같은 소형 가전의 인기는 '싱글족'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장기화된 불황과 결혼에 대한 인식변화로 혼자 사는 인구가 늘면서 2000년 15.5%이던 1인 가구는 2012년 25.3%에 이어 오는 2020년에는 29.6%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싱글족의 씀씀이도 커지면서 국내 1인 가구의 소비지출 규모도 2010년 60조원에서 2020년에는 120조원으로 2배가량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대기업들도 대형 프리미엄 가전뿐 아니라 소형 가전시장으로까지 점차 보폭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4월 3.5㎏ 용량의 미니세탁기를 출시해 시장성을 엿본 LG전자는 지난달 세탁기·냉장고·전자레인지·청소기 등 소형 가전 7종을 패키지로 묶은 '꼬망스 컬렉션'을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2002년에 출시한 3㎏ 용량의 '아가사랑' 세탁기가 50만대 이상 팔리는 등 꾸준한 인기를 얻자 지난해 10월 기능을 한층 강화한 신제품을 선보였다.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기불황의 직격탄은 일반 서민들에게 돌아가지만 고소득 상류층은 오히려 불황에 지갑을 더 여는 경우가 많다"며 "불황이 장기화될수록 이 같은 소비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업들의 마케팅도 프리미엄과 실속형으로 양분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토요 Watch] 불황의 경제학
[토요 Watch] 불황의 경제학
김현상기자
"비싸고 럭셔리 하거나 싸지만 실용적 이거나"고가 냉장고·수입차 불티 속 실속형 1인 제품도 잘팔려가전·車 소비 양극화 뚜렷
지난해 12월 유럽의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밀레'는 한국 시장에 800만원대의 냉장·냉동고 제품을 출시했다. 냉장고(398만원)와 냉동고(428만원)를 따로 구매할 수도 있고 두 제품을 연결해 양문형 타입으로도 쓸 수 있는 이 제품은 당시 국내 브랜드가 판매 중인 프리미엄 냉장고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화제가 됐다. 과연 냉장고 하나를 800만원이나 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고객들의 구매가 줄을 이으면서 준비한 물량이 모두 팔려나가자 한국지사는 독일 본사에 초도물량의 3배를 항공편으로 보내달라고 긴급 요청했다. 주문이 밀리자 오래 기다릴 바에는 차라리 전시장에 설치된 제품이라도 구입하겠다는 고객까지 있을 정도였다.
올해 초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앞다퉈 600만~700만원에 달하는 고가 프리미엄 냉장고를 내놓을 때도 요즘 같은 불경기에 몇 대나 팔리겠느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양사의 프리미엄 냉장고는 출시 한 달 만에 나란히 판매대수가 1,000대를 넘어섰다. 매년 판매기록을 경신해온 수입차 시장에서도 올 1~4월 한 대당 1억5,000만원이 넘는 초고가 차량 판매가 지난해의 2배 가까이 늘어날 정도로 호조세가 이어지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소비자들의 지갑이 갈수록 얇아지면서 내수침체 장기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오히려 값비싼 프리미엄 제품을 찾는 손길은 점점 늘어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소득이 줄어도 그에 비례해 소비가 줄지 않는 '소비의 톱니효과'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최근 자기만족을 중시하는 가치지향적 소비행태가 두드러지면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상품에 대한 지출을 제일 마지막에 줄이려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는 점도 프리미엄 제품의 인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오랜 불황에 정서적으로 불안해진 소비자들은 합리적인 소비보다 스스로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충동구매하려는 성향이 강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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