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가 추진해온 금융ㆍ재정정책이 제도개선에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나라 및 국민 살림에 적잖은 부담을 키워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1일 한국경제학회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경제학자들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펼쳐온 금융ㆍ재정정책이 금융기관 안정과 경기회복 등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시장 정체와 재정 악화, 국민 부담 증가 등 부작용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시장중심형’ 금융구조로 변화를 추구했지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 오히려 금융 시스템에 여러 가지 형태의 불균형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자금순환 은행 위주로 ‘비정상화’=이날 ‘금융시스템의 변화와 평가’라는 주제발표에 나선 함준호 연세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의 전면 개방 등 전반적인 제도개선에도 불구, 시장중심형 금융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추진된데다 가계 부문의 안전자산 선호로 비은행 부문이 크게 위축되고 기업신용위험이 높아졌는가 하면 잠재 부실기업이 상존함에 따라 자본시장으로의 자금 흐름이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은행으로 집중된 금융저축은 은행들의 보수적인 자산운용 행태로 인해 기업 등 실물 부문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부동산시장으로 순환돼왔다는 것이 함 교수의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 90년대 후반에 50%를 넘나들던 기업 간접금융조달액 중 비은행금융기관의 비중은 현재 30% 중반까지 떨어졌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주식과 채권시장 비중은 2005년 현재 각각 91.2%와 83.2% 수준에 그쳐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함 교수는 “자본시장 성장이 위축됨에 따라 신기술ㆍ고위험 기반 혁신산업이나 유망 중소기업의 금융수요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는, 이른바 금융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은행으로 편향된 자금순환 구조를 정상화하고 은행과 자본시장의 연계가 강화된 금융구조를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금융기관의 그룹화 및 대형화 역시 잠재적인 시스템 위험도를 높여놓은 것으로 지적됐다. 함 교수는 “외견상으로는 금융기관 수익성과 건전성이 크게 높아졌지만 이 같은 추세가 공적자금 투입의 단기적 효과인지, 경쟁력 강화인지는 불분명하다”며 “소수 대형금융그룹으로의 재편은 오히려 시장의 시스템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형 금융그룹의 위험 통제와 원활한 퇴출이 이뤄지지 않고 실물 부문 및 해외 부문에 대한 직간접 노출이 강화되는 등 다양한 잠재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함 교수는 “중소기업 부문의 금융시스템 확충과 금융 대형ㆍ그룹화에 대응한 그룹 단위의 건전성 규제 등 금융감독기능 효율화 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세부담 높아지고 재정은 나빠지고=재정정책 면에서도 문제가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산세 등 일부 세금 부담이 선진국을 훌쩍 넘을 정도로 높아진 한편 국가채무가 크게 급증해 재정 건전성도 악화됐다는 것이다. 이창용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정정책의 역할과 과제’ 논문을 통해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채무가 급증, 우리나라가 더 이상 재정 건전국가가 아니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 또 다른 위기가 닥칠 경우 과거처럼 재정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교수는 “위기 이후 경기회복에 긍정적 역할을 한 재정정책이 한편으로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다”며 “외환위기 이전 6%를 넘지 않았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중은 2006년 현재 33%로 증가했고 예금보험공사채권이나 부실채권정리기금채권 등 국가보증 채무까지 합하면 37%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선진국들이 현재 한국 국민소득 수준인 1만6,000달러에 도달했을 당시와 비교할 때 한국의 국가채무 규모가 낮지 않다”며 “한국은 더 이상 재정이 건전한 국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민연금ㆍ의료보험 등 사회보험제도는 선심성 구조에 인구 고령화까지 겹쳐 장기적인 기금고갈 위기에 처해 있는 상태로 지금과 같은 운용체계로는 국민경제의 성장동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우려했다. 이 교수는 “재정건전성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복지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조세부담률의 증가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며 “정부지출 구조의 재조정 등 재정정책의 기조에 근본적 변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재산세 부담은 사회ㆍ경제적 요건을 고려할 때 적정수준보다 높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날 조세 분야에 관해 발표한 이영 한양대 교수에 따르면 2005년 우리나라 GDP 대비 재산세 부담은 3.06%로 적정 수준 추정치인 2.12%보다 상당폭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 해외와 비교해도 미국 3.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2.0%에 불과하며 총조세 대비 재산세수 비중이 국내는 15%로 OECD 평균(8%)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라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이 교수는 또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이 OECD 국가와 단순 비교하면 낮지만 1인당 GDP, 인구규모, 고령인구 비중 등을 고려하면 낮은 수준으로 볼 수 없고 미래의 조세 부담인 국채 규모를 고려한다면 2000년대의 실질적인 조세부담률은 공식 조세부담률보다 약 1%포인트 정도 높다”고 지적했다. 특히 종합부동산세의 대폭 확대로 재산세는 적정수준보다 크게 높아질 전망이어서 “재산관련 세금을 지나치게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 교수는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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