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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球를 海球라 부르자
입력2003-05-06 00:00:00
수정
2003.05.06 00:00:00
지구의 표면적 중 72%가 바다임에도 우리는 오늘날까지 땅을 의미하는 지구란 표현을 별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다. 바다가 아닌 땅에서 삶을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가자는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행성을 해구(海球)라고 불렀으면 한다.
세계사를 되돌아보면 해양세력이 항상 내륙세력에 우위를 점하였다. 말 그대로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도전과 개척으로 대변되는 해양지향적 사고가 쇄국과 안주로 점철된 내륙지향적 사고를 이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날 세계는 미국이 지배하고 있다. 분쟁지역의 바다 위에는 예외없이 미국의 항공모함이 떠있다. 바다를 통제함으로써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 미국 땅의 원래 주인은 유럽인이 아닌 아메리칸 인디언이었다. 그런데 이들 원래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속된 표현으로 동물원의 원숭이 신세가 되어 보호지역에서 처량하게 살고 있다. 내륙에 안주하고자 했던 인디언들은 바다를 통해 번영을 이루고자 했던 유럽인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고구려가 수와 당을 제압하고, 장보고대사가 해양제국을 건설했으며, 이순신 제독이 남해제해권을 확립하기도 했지만 긴 역사에 비추어 이는 순간에 불과했다. 다소의 부침은 있었지만 우리는 대륙의 큰 형님인 중국을 어떻게 잘 섬기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바다로의 진출은 안중에 없었다. 왜구가 침범한다고 섬과 해안의 백성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정책을 폈다. 그 결과 왜국(倭國)이라 부르며 무시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아직도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는 바다를 단지 육지의 부속물이나 육지를 단절하는 공간으로 여기며 바다를 멀리 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오뉴월에는 절대 물가에 가지 마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위험은 무조건 피하자는 사고속에서 우리의 미래는 없다. 역사는 항상 바다로 나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양의 선각자들처럼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에는 해양중심적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 자기 국익에만 매달리는 제한적 국가관의 20세기적 가치는 이제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며 평화와 공동 번영을 도모하는 해양중심적 가치로 바뀌어야 한다. 도전과 개척의 진취적 기상과 함께 인간중심의 보편성과 포용성을 갖춘 해양인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형으로 삼아야 한다.
바다는 우리 인류가 삶의 터전으로 새롭게 구축해 나갈 대상이고,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이상이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 수단이다. 바다에서 바라본 우리 한반도는 유라시아와 미주를 하나로 연결하는 중심점에 우뚝 서 있다. 이는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국가주의에서 보편적 인간중심의 세계주의로의 변화를 주도해야 하는 역사적 중심점이기도 하다.
<최낙정(해양수산부 차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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