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해외의 펀드시스템은 들어왔지만 철학은 함께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청지기가 돼 고객의 자산을 잘 지켜내는 것이 펀드의 의무입니다. 내 돈처럼 관리한다면 경영진이나 대주주의 부정한 행위를 보고 아무 일도 안 하겠습니까. 그건 직무태만입니다."
주주총회 의안분석회사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54ㆍ사진) 사장은 우리나라 기관투자가들의 주주권 행사 행태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육체만 있고 영혼은 없다는 그의 지적에 어느 한 구석 따끔하지 않은 기관투자가가 있을까.
서스틴베스트는 올해 국내 민간기업 중 최초로 주주총회 의안분석 시장에 뛰어들었다. 국내에 주총안건을 분석하는 곳은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2곳뿐이다. 많은 기업의 주총안건에 대한 의견을 내지만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또 돈을 내고 리포트를 받아보는 투자자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돈이 생기는 시장이라기 보다 주주권 강화를 위한 사회운동적인 성격이 더 강한 게 사실이다.
그런 시장에 민간기업이 왜 뛰어들었을까. 돌아온 류 사장의 답은 이렇다. "올바른 주주권 행사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다. 주총의안분석은 전문성과 독립성이 필요하며 이는 명백히 민간이 해야 할 영역이다. 사업적으로는 '퍼스트 펭귄'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도 2~3년 후에는 주총안건 분석시장이 열릴 것이다."
서스틴베스트는 올해 주총시즌에 약 200개 상장사의 주총안건에 대한 분석보고서를 기관투자가들에게 제공했다. 회계사, 증권사 및 경제연구소 연구원, 투자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직원 20여명이 1년 가까이 매달린 결과다. 류 사장은"주총안건이 기업의 가치, 주주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지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며 "견제와 균형을 통해 시장측면에서 기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가 판단의 핵심기준이었다"고 밝혔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결과는 실망스럽다. 서스틴베스트가 반대의견을 제시한 주총안건이 실제로 부결된 경우는 없었다. 류 사장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영국의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퇴직금을 줄여 에이즈 약값 인하에 보태라는 주주제안이 주총에서 표대결 끝에 부결됐지만, 이후 이사회가 주총 결의를 뒤집고 이를 받아들였다"며 "소수주주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는 문화는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류 사장은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기관투자가들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그는 "연기금 등은 특정 회사의 지분을 장기간 대량으로 보유하기 때문에 기업이 일감 몰아주기, 횡령ㆍ배임 등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를 모른척하면 안 된다"며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 보다 보통주의 가격이 높은 것은 바로 그 주식에 주주권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힘이 빠질 법도 하지만 류 사장은 오히려 더 적극적이다. 내년에는 분석기업을 400개로 늘리고, 깊이 있는 분석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묻자 "전향한 사람의 의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류 사장은 과거 13년간 증권사에 몸 담았던 잘 나가는 증권맨이었다. 한 대형 증권회사에서 IMF외환위기 때도 수익을 내는 등 최고의 수익률을 자랑하며 고액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그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되자 회의를 느껴 회사를 그만두고 지난 2000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오로지 수익만을 추구하는 투자문화에 신물이 났다"며 "영국에서 사회적책임투자를 접해 보니 그간의 전문성을 살리고 한국 주식시장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류 사장이 설립한 서스틴베스트는 올해로 7년째를 맞는다. 약 5조원 규모인 국민연금의 사회적책임투자(SRI)펀드 중 3조원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하고, 국내외 SRI펀드와 이들이 투자한 기업과의 가교역할도 한다.
그의 '전향'은 서서히 빛을 보고 있다. 류 사장은 "최근 주주면담을 요청해 만난 한 대기업의 경우 처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진정성을 이해시키자 태도가 달라졌다"며 "공개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제안한 방안을 경영에 반영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류 사장은 앞으로는 우리나라의 주주권 강화 방법도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주주와 기업간의 갈등을 노출시켜 시장의 관심을 끄는 게 1단계였다면, 이제는 기업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류 사장은 "진정한 주주권을 행사하려면 기업과의 비공식 대화를 통해 우려와 함께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며 "갈등이 아닌 합리적 협력을 통해 주주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이런 방법은 기업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추세"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