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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 변수 발생할 때마다 경영 승계 프로그램 가동
GE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 내부 인재 중용 모범사례
회장 임기만료 수년전부터 후보군 선정해 직무 평가
대한민국 금융산업의 후진성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지배구조다. KB금융 사태는 그릇된 지배구조가 정상적인 조직을 얼마나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선진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어떨까.
지난 2004년 글로벌 기업 맥도날드의 최고경영자(CEO)인 제임스 캔탈루포가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맥도날드는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점원 출신의 찰리 벨을 후임 CEO로 선임했다. 단 하루 만에 이뤄진 초고속 조치였다. 그런데 7개월 후 벨 역시 결장암 판정을 받았다.
이번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사회는 경영진 중 하나였던 짐 스캐너를 신임 CEO로 임명했다.
맥도날드는 돌발변수가 발생할 때마다 경영 승계 프로그램을 가동해 갑작스러운 CEO 공백 사태를 막아냈다. 맥도날드는 바람직한 지배구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맥도날드와 KB금융을 오버랩시켜보면 많은 부분에서 엇박자가 난다.
KB금융에는 CEO 승계 프로그램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그 결과 가장 중요한 후임 CEO 선출은 뒷전으로 밀리고 현재는 이사회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 있다. 기묘한 현상이다.
금융 당국 고위관계자는 "맥도날드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지배구조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라며 "CEO 선출권한을 갖고 있는 이사회가 불신의 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그만큼 지배구조가 후진적이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체계화된 CEO 승계·양성 프로그램 급선무=금융산업의 지배구조 개선작업에 앞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승계 프로그램과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은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전자가 CEO 공백을 최소화해 조직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정통성 있는 CEO를 선출함으로써 조직 단합을 도모할 수 있다.
프랑스계 금융사인 BNP파리바는 경영 승계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1993~2002년 CEO와 이사회 의장을 겸임했던 미셸 페베로가 2003년 CEO를 사퇴하자 2명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중 한 명이었던 보두앵 프로가 신임 CEO로 선임됐다. 2011년 페베로가 이사회 의장을 그만두자 그 자리를 프로가 물려받았다. 차기 CEO는 COO 중 하나였던 장로랑 보나페가 CEO로 선임됐다. 계단을 오르듯 자연스러운 권력 이양이 이뤄진 것이다. 잡음은 일지 않았다.
시장이 납득할 수 있는 경영승계제도를 갖췄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BNP파리바는 내부 복수후보 경쟁 방식의 CEO 승계 모델을 적용하고 있다. 그룹에는 2명의 COO가 있는데 이들이 차기 CEO 후보다. CEO 임기 만료 6개월 전 CEO 최종후보자를 확정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가동한다.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CEO 선임권한을 갖고 있는 이사회는 전횡을 일삼고 이 모든 과정이 밀실에서 이뤄진다. 후계구도의 불확실성은 외풍의 근원지가 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 정치금융과 낙하산 관행이다.
KB금융은 신한과 하나금융이 회장후보추천위원회에서 후보를 내는 것과 달리 복수의 외부 컨설팅사를 통해 후보 리스트를 작성한다. 개방형이라는 겉옷을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외풍의 근원이 되고 있다.
◇CEO 정통성 세우려면 CEO 양성 프로그램 절실=돌이켜보면 KB금융은 CEO 인사 때마다 잡음을 일으켰다. 적합 여부를 놓고 노사는 늘 대립해야만 했다. 정통성이 결여된 CEO 인사가 만들어낸 파열음이다.
글로벌 기업인 GE는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내부승계를 유지하는 모범적 사례로 평가된다.
GE가 운영하는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은 장기적이면서도 체계적이다. 순서는 크게 네 단계로 이뤄진다. 먼저 본사 및 계열사 소속 3,000여명의 간부급 직원을 대상으로 리스트를 작성한다. 이후 성과 위주 평가 시스템을 통해 500명을 가려내고 같은 과정을 진행해 20여명을 간추린다. 마지막으로 최종 3인의 후계자 후보를 추려낸다.
GE의 전임 회장 잭 웰치는 자신의 임기가 7년이나 남은 시점인 1994년, 이사회를 통해 CEO 후보군 23명을 선발했다. 이후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직무수행능력평가를 진행해 제프 이멜트를 후임자로 결정했다.
특히 GE의 사례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CEO 후보자 고려항목으로 '최소 10년간의 GE 근무경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규정대로라면 KB금융의 어윤대 전 회장, 임영록 회장 등은 가능성이 애당초 없는 셈이다. 또 이것은 후계자 양성의 명분이자 원동력이 돼 내부인재의 중용으로 이어진다.
한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임종룡 NH금융지주 회장의 사례에서 보듯 외부인사라고 해서 모조리 나쁜 것은 아니다"라면서 "그러나 조직 안에서 장기육성과정을 거친 내부 출신은 정통성 논란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변죽만 울려온 금융 당국=좌초하는 KB금융을 구하기 위해서는 차기 CEO 선임이 시급하다. 그러나 사람에 기대는 것은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시스템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2011년 금융감독원은 신한 사태 후속대책의 일환으로 각 금융그룹에 '경영진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 운영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인터넷 연수과정 같은 것들이 포함된 양성 프로그램은 아무 실효가 없었다. 금감원 역시 사후관리를 등한시하면서 지배구조 개선대책은 변죽만 울리는 꼴이 돼버렸다. 그릇된 지배구조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난 지금 강력한 의지를 갖고 후속대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2008년 국세청 개혁 바람이 불자 기획재정부는 컨설팅사를 통해 용역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안에는 리더 양성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었다"면서 "그러나 용역 결과 이후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KB금융 사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선 당국의 사후관리·감독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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