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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경제구조개혁 단 2번 있었다

■ 광복 70년 다시 뛰는 대한민국

1964년 장기영 부총리 주도… 정치불안 속 개혁 드라이브

전두환정권 산업합리화 정책, 자동차·해운업 군살빼기 단행


1945년 감격의 광복 이후 우리 경제에 자발적인 구조개혁은 단 2번 있었다. 외환위기 후 혹독한 구조조정이 있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구제금융을 제공한 국제통화기금(IMF)발 타의의 개혁이었다.

첫 번째는 고 장기영 전 경제부총리가 주도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성장전략을 '내수확대'로 잡고 통화가치를 10대1로 낮추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경제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등 삐걱댔다. 이때 구원투수는 한국은행 조사국장 출신의 언론인 장기영. 박 전 대통령은 1964년 그를 경제부총리에 임명했다. 1960년 국내 최초의 경제신문인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하기도 한 장 전 부총리는 "6개월만 기다려달라"고 천명한 뒤 특유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경제 난맥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1965년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복수환율제를 단일변동환율제로 이양하는 결단을 내렸다. 환율에 시장기능을 반영해 만성적인 경상 적자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다. 내수 중심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출 제조업 중심으로 수정하면서 이른바 고도성장의 또 다른 표현인 '한강의 기적' 초석을 다졌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핵심 수단은 그가 제창한 수출진흥확대회의. 박 전 대통령은 1965년 2월부터 매달 청와대에서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8차례 열린 무역투자진흥회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의 2.0 버전인 셈이다. 당시의 성장전략은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성장공식으로 유효하다.



장 전 부총리는 미국 등 외국과의 교류에도 가교역할을 했다. 1966년 린든 존슨 전 미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영접위원장을 맡아 숙소인 워커힐호텔에 가 목욕탕 수압도 일일이 점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강력한 추진력에 주변의 반발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욕 많이 먹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한국경제라는 배에 물이 들어와 가라앉고 있는데 욕먹는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아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두 번째 개혁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의 산업합리화 정책이었다. 이때는 신자유주의자인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주도했다. 1983년 아웅산묘역 폭탄테러로 운명을 달리한 그는 197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 문제를 효율화하기 위해 자동차·해운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980년대 중반에도 신병현 경제부총리 주도로 석탄·조선·발전설비 분야 기업의 통폐합이 있었다. 이 같은 산업 군살 빼기는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의 바탕이 됐다. 다만 기업 통폐합으로 특정 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재벌' 문제가 시작됐고 이후 1997년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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