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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홍수와 금융의 역할(사설)
입력1997-08-04 00:00:00
수정
1997.08.04 00:00:00
올 상반기중 어음부도액이 11조원에 이르렀다. 작년 한해 동안의 12조원에 거의 육박하는 수준이다. 이는 우리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을 잘 설명해주는 수치다. 부도율은 서울 0.23%, 전국이 0.3%로 지난 71년 이래 최고다. 문민정부 출범을 전후한 92∼93년의 불황기에도 서울은 0.07%였고 전국은 0.12∼0.13%였다. 각각 세배 가까이 증가했다. 경제가 잘 돌아가던 80년대말의 서울 0.02%, 전국 0.04%와 대비한다면 무려 10배나 되는 부도율이다.지난 4월에는 대기업만을 대상으로 하는 부도유예협약이 등장했다. 변칙적인 금융거래수단인 이 협약은 한편으로는 중소기업의 목을 조르는 격이 됐다. 금융시장의 불안을 오히려 증폭시키고 있는 셈이다.
○정책 부재의 금융시장
어음부도는 기업의 방만한 경영에도 기인하지만 금융시장의 신용관리에도 문제가 있다. 과다한 부채와 고금리의 악순환 속에서 무리한 투자를 서슴지 않다가 돈줄이 막히면 쓰러지는 것이 부도다.
1차적으로는 경영을 잘못한 기업이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기업이 부도에 직면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별안간 돈줄을 막아버린 금융시장의 책임도 있다. 경영이 부실한 기업이 쓰러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자금길이 얼어붙어 수많은 기업이 무더기로 연쇄 도산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기업의 잇단 도산은 열악한 금융시장의 구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 부도를 낸 기업은 7천2백33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일부 재벌급 기업들만 부도유예협약의 적용을 받았다. 또 어느 대기업이 이 협약의 적용대상이 될지 이를 우려하는 부도 도미노 공포가 자금시장을 경색시키고 있다. 부도유예협약 조치와 함께 확실한 금융시장정책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용공황사태 우려도
한보로 시작된 금융시장 불안과 부도 도미노는 이번 기아사태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지금 시중에는 각종 설이 나돌고 있다. 금융시장의 부실채권이 시장구조의 개선을 통해 단계적으로 정리돼야 하는데도 그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자금흐름이 일시에 정지되면서 쓰러지는 기업들이 무더기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 금융시장의 현실이다. 이러다가는 신용공황 사태도 우려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금융관행으로는 관과 금융시장이 합작해서 대기업에 편중, 거액대출을 해왔다. 정경유착일 수도 있고 정책개입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별안간 금융시장에만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양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금융시장으로서는 부실채권에 대한 불똥이 누구에게 떨어질지 몰라 약간의 부실 가능성만 보여도 자금회수에 나선다. 지나친 몸보신이며 현실안주다. 모두가 구경꾼일 따름이다.
금융시장의 현실도 딱하다. 왜곡된 시장구조를 개선할 힘도 없으며 당면한 부실채권에 대한 처리방법도 마련할 수 없는 것이 금융시장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따라서 금융시장은 제각기 살길을 마련해야 할 형편이나 저마다 입장이 다르다. 은행간 부도유예협약을 만들 때 단자시장은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감독권을 통한 「엄포」로 일단 수용은 됐다. 이번에는 리스 등의 장기시설 대여기관에서 여차하면 어음을 돌리겠다는 식이다.
○모두가 구경꾼 현실안주
이는 금융의 「시장기능의 무원칙」에 근본원인이 있다. 우선은 정부의 책임회피로 인한 정책부재 탓이다. 정부는 금융을 자율화하고 시장기능에 맡긴다는 원칙을 내세운 바 있으니 할말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방을 의무화하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아래서, 자본 자유화를 의무화하고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서 금융시장에의 개입은 어렵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발뺌은 정책부재에 대한 해명이 못된다.
통화관리와 시장구조 개선은 정부가 할 일이다. 은행은 통화의 창조를 수반한 통화금융기관으로서 자금의 흐름을 원활하게 조절하는 곳이다. 부도는 기업이 자금결제를 하지 못한데 기인하지만, 은행이 신용으로 이를 막아주지 못한 것이 최종적인 부도처리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자금이 부족하거나 회수 불능인 부실채권을 책임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대한 해법은 중앙은행이 부족한 자금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또 부실채권에 대한 대책을 정부와 금융시장이 함께 걱정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시적으로는 불황극복이다. 그러나 미시적으로는 부실기업을 회생시키는 책임을 지는 소신이 있어야 한다. 정부와 중앙은행과 금융시장이 공동으로 원칙을 정해 적극적인 대책을 모색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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