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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르네상스] 30대재벌 규제 현실성이 없다
입력1998-12-01 00:00:00
수정
1998.12.01 00:00:00
「재벌이라고, 다 같은 재벌이 아니다.」근력이 튼튼한 성인남자와 비쩍 마른 어린이에게 「하루에 한끼만 먹어라」고 강요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성인남자는 한끼에 양껏 식사를 해치우는 방법으로 수십년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위장이 적은 어린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같은 가정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우리나라 재벌정책에는 엄연히 있다. 정부의 30대 재벌에 대한 규제제도가 바로 그렇다. 정부는 재벌에 의한 경제력집중과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막는다는 취지로 매년 30대 대기업집단을 선정해 이들의 활동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제한하고 있다.
정부의 재벌 규제론은 일면 타당한 부분이 있다. 일부 상위재벌에 편중되는 자원을 고루 분산시켜 중소기업을 비롯한 국가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취지는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적용범위다. 수십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수십조원의 외형을 자랑하는 대형 그룹은 물론, 불과 몇 개의 계열사로 1조원 미만의 자산을 갖고 있는 기업도 30대 재벌의 범주에 포함돼 똑같은 규제를 당하고 있다. 체중이 서로 다른 헤비급 선수와 슈퍼 라이트급 선수가 같은 조건에서 시합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에따라 정부 재벌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30대 재벌」이라는 무리한 범위지정은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의 재벌정책은 「대규모 기업집단」제도를 통해 관철되고 있다. 대규모 기업집단제도란 계열사간 채무보증을 제한하고 기업결합, 내부거래 등에 대해 별도의 사후관리를 하는 조치다. 이 제도는 지난 86년에 처음 도입돼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98년 「30대 대규모 기업집단」의 총자산은 435조3,180억원. 지난해의 348조3,640억원보다 24.9% 늘어났다. 그러나 이 가운데 상위 5대재벌의 자산규모(273조900억원)가 전체의 62.8%를 차지하고 있으며, 10대 재벌로 보면 그 비중이 78%로 높아진다. 다시말해 6대부터 30대까지 25개그룹을 모두 합쳐봐야 외형규모가 상위 5대그룹에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현대와 삼성 등 양대 그룹의 경우 자산규모는 각각 60조원을 넘는다. 반면 똑같이 30대 재벌로 포함된 한일이나 강원산업 등 군소재벌의 자산규모는 대부분 2조원선에 불과하다. 무려 30배 가량의 외형 차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하위 재벌은 「대규모 기업집단」이라는 용어로 불리기에도 부끄러운 실정이다.
이러다보니 자산총액 순위로 30개사를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동일한 정책을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 지적은 비단 어제오늘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정부는 행정편의에 의해 이같이 비현실적인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오고 있다.
최낙균(崔樂均) 산업연구원 정책연구실장은 『30대 기업집단 가운데 이미 절반 가량이 화의(和議)나 법정관리,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등으로 그룹간판을 사실상 내렸으며,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그 격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며 『재벌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000년부터 대기업집단 지정범위를 5대그룹 이내로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崔실장은 또 『출자총액 규제가 이미 폐지됐고 채무보증제한도 2년후에 완전히 폐지되는 만큼, 그 때에 맞춰 지금부터라도 대기업 범위를 축소하는 준비작업을 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崔실장의 지적대로 상위재벌과 하위재벌간에 일정한 칸막이를 해야한다는게 업계관계자는 물론 경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익히 알다시피 상위재벌들이 백화점이라면 하위재벌은 구멍가게 수준이다. 덩치가 이처럼 차이가 나지만 이들 30대그룹을 대하는 정부의 시각은 똑같다. 규모에 상관없이 적용되는 재벌규제정책이 기업들에 대한 역차별 요인으로 작용해 오히려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K그룹 C회장은 『외국의 거대 기업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단지 30대 재벌 소속기업이라 해서 온갖 제한을 받는다면 이는 명백히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다』고 주장했다.
LG경제연구원의 강태욱(姜泰旭) 선임연구원은 『정부는 가급적 시장의 논리에 기초한 정책을 구사해야 하며, 개입이 불가피할 경우에도 규제대상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경제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에따라 재계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재벌정책을 수정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해왔지만 개선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전경련은 공정거래법을 비롯한 경제력집중 해소책은 기업의 크기를 감안해 보다 세분해야 하며 5대그룹에만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업계와 전문가들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일언반구 말이 없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한술 더 떠 부당내부거래와 채무보증 관리를 보다 엄격히 적용해야 할 대상이 10대 이하의 중견그룹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10대그룹보다 경영이 불투명한 이들을 대기업집단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배임행위라는 주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자기자본 대비 채무보증비율을 보더라도 10대 이하의 재벌들이 더욱 열악한 실정』이라며 『기업들의 재무건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현행 30대 기준이 적합하다』고 시정할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공정위가 새 정부들어 기업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데 개혁이란 차원도 있겠지만, 공정위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밥그릇 벌어두기」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공정위가 최근들어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 정부 주요기관으로 자리를 굳히기 위해 앞으로도 기업활동규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업의 경쟁력을 살리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당국의 보다 전향적인 자세변화를 기업들은 기대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김희중 차장(팀장), 채수종·이용택·고진갑·권구찬·한상복·정승량·김기성·박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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