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환관)를 두고 학계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고자'에 대한 논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내시도 엄연한 역사다. 우리 기록에 내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 말인 9세기 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 진시황 때 환관 조고가 전횡을 일삼았으니 이런 제도가 훨씬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내시의 존재는 전제권력과 직결된다. 왕이 전제권력을 휘두르며 신하들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중국사에서는 왕의 손발 노릇을 할 내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거꾸로 내시가 왕권을 등에 업고 '오버'할 가능성이 컸다. 조고를 비롯해 후한말 십상시, 명나라의 왕진 등이 그렇다. 하지만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룬 조선에는 두드러진 경우가 없다. 왕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내시 역할도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왕과 여자(후궁·궁녀 등)로 구성되는 궁궐이 유지되는 한 내시는 없앨 수 없다. 월계동 초안산에는 이런 내시들의 무덤이 많다. 사진은 내시로서 기록이 확실한 승극철 부부의 무덤이다. 그는 숙종 때인 17세기 말 내시부 상세(內侍部 尙洗·종6품)를 지냈다고 묘비에 적혀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