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용車인수 승부수의 끝은…김우중 회장은 "부채도 자산" 이라며 위기의 순간에도 '외상 경영론' 을 고집했다. 환란 직후 김태구(오른쪽) 대우차 사장과 김덕환 쌍용그룹 종합조정실 사장이 M&A를 발표하는 순간 재계는 경악했지만 김 회장은 의연했다.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마불사론'을 외쳤다. /서울경제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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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권은 '기회의 땅' 이었나김우중 회장은 확장 전략의 근거지를 개발도상국으로 삼았다. 동구권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빚을 내서라도 동구의 공장들을 사들여갔다. 루마니아 로대공장에서 생산된 씨에로 1호차를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김 회장. 하지만 수익성 없는 공장은 대우의 재무구조를 급속하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서울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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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무너진 '금융 모래성'
"구조조정 안하고 무역금융만 달라니…"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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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위기의 순간에도 쌍용車인수
ㆍIMF체제 바뀐 환경 외면한채
ㆍ돈조달 기법만 맹신 '외상 경영'
ㆍ'무감원' '大馬불사론' 고집속
ㆍ글로벌 스탠더드에 잇단 도전
ㆍ사람에 의존한 경영도 패착
“기업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던 김우중 회장. 그에게 ‘돈’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돈’과 ‘기업’간에 얽힌 함수풀이, 그것은 김우중 신화가 몰락하게 된 원인을 해석하는 데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초고속 성장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바로 ‘금융’이었고 스스로 내세웠듯 5대 그룹 총수 가운데 돈의 흐름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에 대한 자신감은 위기의 순간 대우에 결코 약(藥)이 되지 못했다.
IMF 구제금융 협상이 임박했던 97년 11월 중순. 서울역 앞 대우센터 구조조정본부장실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쌍용그룹 관계자의 연락이었다.
“쌍용자동차 (인수할) 생각 있으십니까.”
소식은 곧바로 회장실로 보고됐다. 김 회장은 2년 전 GM을 제치고 폴란드의 국영 승용차업체인 FSO를 인수했던 게 떠올랐다. 동물적 감각이 발동했다.
“(벤츠와) 얘기가 잘 안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바로 구조본에 비상이 걸렸다. 쌍용의 자금동향과 벤츠와의 협상과정을 알아보기 위한 ‘비밀작전’에는 김 회장이 직접 나섰다. 쌍용에서의 연락은 잠시 뜸하는 듯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곧 상황이 달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쌍용車인수 승부수의 끝은…김우중 회장은 "부채도 자산" 이라며 위기의 순간에도 '외상 경영론' 을 고집했다. 환란 직후 김태구(오른쪽) 대우차 사장과 김덕환 쌍용그룹 종합조정실 사장이 M&A를 발표하는 순간 재계는 경악했지만 김 회장은 의연했다.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마불사론'을 외쳤다. /서울경제 DB
동구권은 '기회의 땅' 이었나김우중 회장은 확장 전략의 근거지를 개발도상국으로 삼았다. 동구권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빚을 내서라도 동구의 공장들을 사들여갔다. 루마니아 로대공장에서 생산된 씨에로 1호차를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김 회장. 하지만 수익성 없는 공장은 대우의 재무구조를 급속하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서울경제 DB
쌍용은 9월 이후 벤츠와 협상을 진행해왔지만 쌍용차의 부채가 벤츠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던 것. 증시에는 쌍용의 화의신청설과 법정관리설 등 악성 루머들이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벤츠에 목을 매鳴〈?그룹이 공중 분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쌍용 내부에 팽배해졌다. 부도유예협약과 화의신청 등 온갖 시나리오가 오갔다.
김 회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12월 초. 곧바로 김석준 쌍용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형 M&A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협상은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김 회장이 들고 나온 것은 ‘선인수, 후정산’ 방식. 심벌 마크인 ‘외상 경영론’이었다. 김석준 회장은 벤츠 측에 당장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다른 업체에 넘기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벤츠는 포기를 선언했다. 대우의 쌍용차 인수는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결정됐다.
환란에 떨며 금융기관들이 너도나도 대출회수에 나서고 재벌들도 예정된 투자를 모조리 취소하는 등 몸집 줄이기에 나선 시점, 김 회장의 ‘대마불사론’은 여지없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쌍용차 실사 결과가 나오자 인수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불거져나왔다. 부실규모가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 ‘돈 잡아먹는 하마’였다. 하지만 김 회장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대우식 경영은 불황 속의 한국경제에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는 이번에도 조흥은행에 원리금 상환을 3년 동안 유예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은행 측은 이자만큼은 정상이자를 내야 한다고 버텼고 결국 관철됐다. 하지만 김 회장은 양보의 대가로 다시 1,500억원을 얻어냈다. 인수할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대출받는 LBO기법. 이는 김 회장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심어줬다. 주머니 돈이 쌈짓돈인 셈이었다. 고금리 시절, 부채 증가는 곧 파멸을 의미했지만 김 회장에게 ‘부채는 곧 자산’이었고 IMF 이후 바뀐 게임의 규칙은 아직 실감날 정도는 아니었다.
시계추를 돌려 95년 5월, GM과 입찰경쟁 끝에 폴란드 FSO를 인수한 직후. 대형 M&A건이 발표되자 김 회장이 투자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김 회장의 답변은 단순했다.
“언론 보도처럼 대우가 막대한 돈을 내는 것은 아니다. 현지법인이 전체 투자금의 60%를 현지 정부 지급보증으로 빌리고 나머지 40%도 대주주인 현지 정부와 대우가 분담하면 된다. 대우 분담액도 수출입은행 융자 등으로 80%를 해결하고 나머지는 국내 계열사의 현물출자로 충당하면 문제가 없다.”
화려한 파이낸싱 기법. 김 회장은 선도적이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마저 부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IMF 체제는 그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금융비용을 요구했다. 한번 꼬인 사슬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대우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을 지낸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이 김 회장의 금융기법에 대해 평가한 대목은 매우 비판적이다.
“김 회장이 쌍용차를 인수한 것은 대우쪽 현금흐름을 더 좋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위기를 어떤 형태로든 극복하려면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확장전략으로 돌파하자는 전형적인 대마불사론을 펼친 거죠. 이건 전략이 아닙니다. 시대가 변한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겁니다.”
금융에 대한 잘못된 맹신은 글로벌 흐름에 대한 역류로 이어졌다. 98년 6월10일 군산자동차 공장에서 가진 전경련 출입기자 오찬간담회.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자신의 ‘금융론’을 역설했다.
“IMF를 맞은 것은 무엇보다도 금융이 낙후됐기 때문이다.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하는 데 대략 120일 걸린다. 수출 후 결제기간을 합하면 180일이다. 현 금리수준은 연 12%에 가깝다. 180일로 따지면 제조원가가 6% 증가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상수지 흑자를 늘려 금리를 낮춰야 한다.”
신탁통치자인 IMF의 고금리 처방에 대한 도전이었다. 김 회장의 ‘무역흑자론’은 신탁통치자에 대한 저항이었고 그는 자신만의 처방전을 고집해나갔다. 정부는 그런 김 회장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98년 5월과 10월, 회사채 및 기업어음(CP) 보유한도를 제한해버린 것이다.
계속되는 글로벌스탠더드에의 도전. IMF 체제에 대한 도전은 경영 곳곳에 흩뿌려졌다. “단 한명도 해고하지 않겠다”는 한 마디로 일거에 GM을 따돌리고 FSO를 인수한 ‘저력’은 대우 본사에도 이어졌다. ‘무감원 경영’. 김 회장은 임원 급여의 15%, 과장급 이상 간부 임금의 10%를 삭감하는 대신 직원 감원은 피하는 정면 돌파 방식을 택했다.
‘구식경영’은 그룹의 자금위기가 한계점에 이르렀는데도 계속됐다. ‘시스템 삼성’과의 차별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당시 금융감독원 임원의 발언이 흥미롭다.
“삼성은 얄미울 정도로 시류 변화에 민감했습니다. 반발 때문에 손대지 못한 구조조정을 ‘정부가 밀어붙이니까 어쩔 수 없다’며 밀어붙였지요. 그러나 김 회장은 어땠습니까. 리딩뱅크 설립을 아이디어라고 내놓지 않나, 구조조정을 하라고 했더니 무역금융을 달라고 떼쓰고….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구식 체제는 기술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대우는 어떤 업종에서도 1등을 하지 못했다. 김 회장은 사석에서 ‘죽기 전에 세계 1위의 제품을 만드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탱크주의’는 그런 그를 구해준 ‘팔기 좋은 모델’이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을 향했다. 어차피 못 넘을 산은 포기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개도국론’은 1등주의를 주창해온 이건희 회장이 ‘세계경영을 배우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재벌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탱크주의조차 결국 대우의 한계로 다가왔다. 뒤늦게 가전사업 등에서 첨단기술을 따라잡기 위한 투자에 나섰지만 삼성 등과의 격차가 벌어진 뒤였다. 김 회장과 친분을 유지했던 전직 장관은 이런 평을 내렸다.
“시대적인 상황에서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웅도 바뀌어가는 시대에 맞춰가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제3공화국, 우리 경제가 시장논리보다 정부에 의존해 발전해온 상태에서는 그의 협상능력만으로 클 수가 있었습니다. 80년대 들어 기업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김 회장은 바로 이때 확장보다 기술력이나 사업성을 높이는 쪽으로 버텼어야 해요. 물론 사후적인 논리입니다만…. ”
그는 김 회장이 ‘자기 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던지기도 했다.
“빠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대개 자기도취에 빠지게 마련이지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낸 후 김 회장은 대단한 인물로 각광받았습니다. 전 이미 그때 김 회장에게 위기가 찾아왔다고 봅니다. 소탈하고 대화 채널이 많았던 스타일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그렇고. ”
시대를 역류하는 황제경영. 하지만 제 아무리 철판 같은 권력이라도 구멍은 난다. 사람에게 의존한 경영은 결정적인 순간 사람들에 의해 무너지게 마련이다. 위기상황에서 그가 찾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없었다. 정치인도 통수권자인 대통령도, 심지어 그를 추종하던 경기고 후배들도.
대우의 몰락 후 이뤄진 그의 측근 최고경영자(CEO)들에 대한 재판. 그들 가운데 일부가 재판 과정에서 밝힌 증언은 착잡함을 느끼게 한다.
“김 회장의 지시에 못 이겨 분식회계를 했습니다. 자금사정이 악화돼 부도에 이르게 됐지만 김 회장의 신규 투자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
최종 순간, 김 회장은 그들의 말을 듣고 분노했지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많은 대우맨들은 김 회장의 몰락과 대우의 해체가 ‘타살(他殺)’이라고 말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구실을 제공한 것은 김 회장 자신이 아니었을까.
입력시간 : 2005/06/2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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