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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세워진 첫 선물거래소는 1896년 5월 설립된 인천미두취인소다.
개항 후 각지의 농산물이 인천항으로 몰려들어 인천이 구한말 제1의 상업도시로 자리하면서 생긴 것이다. 이후 정미시설도 크게 늘어나 1930년대엔 60여개에 달해 인천에서 정미업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그 무렵 창간된 '개벽지'는 "공장 직공의 반가량이 정미소에서 일하는 여공이었고 출퇴근 시간대엔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행렬이 장관이었다"고 묘사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미두가의 시세 급변을 이용해서 일확천금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미두장에 속속 모여들었다. 보증금만 갖고 수천~수만석을 매매할 수 있어 미두장은 떼돈을 벌려는 미두꾼들의 투기 대상이었다.
인천미두취인소가 투기장으로 변질되면서 미두가는 급등하기 일쑤였다. 1차 세계대전이 3년째 이어지면서 전쟁 특수로 축적된 일본의 잉여 자본은 급기야 조선의 미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때마침 전쟁 특수로 급상승하던 일본 증시와 동조화가 진행되면서 인천미두취인소의 미두 선물가도 치솟자 일본의 투기자본이 조선에 대거 유입, 1917년부터 미두가는 날개가 돋친 듯 급등했다.
결론적으로 인천미두취인소에 투기자본이 유입되면서 쌀선물이 급등한 데다 일제의 쌀 수탈이 겹치면서 미두가는 폭등했고 이에 따라 일제로부터 민심이 급속히 이탈, 1918년 중반부터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나 농민들의 저항은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1917년 1석에 14원50전이었던 쌀값이 3ㆍ1운동 직전에는 1석당 43원57전까지 세 배나 폭등했으며 2개월간의 휴장 후에도 미두가는 폭등세를 지속해 50원75전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연말부터 급락세로 돌변한 미두가는 1년도 안돼 17원29전까지 폭락하며 또 다른 파국을 맞는 등 조선의 투기꾼들이 큰 피해를 봤다. 당시 '논밭은 동양척식에 빼앗기고 얼빠진 부자들의 낱곡이나 돈뭉치는 미두 바람에 몽땅 날린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미두가의 폭등이 투기적인 요인만으로 발생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시세차익만 노린 매수세뿐 아니라 배당수익을 노린 투자의 요소도 매우 강했다. 당시 취인소의 주주보통배당금은 20% 이내였으나 잉여금이 있을 경우에는 75% 이상을 배상책임준비금으로 적립한 후 추가배당이 가능하도록 돼 있었다. 실제로 상장고저표를 보면 1920년 하반기에 75%라는 엄청난 배당이 이뤄졌다. 연율 150%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배당수익률이다. 요즘 쥐꼬리만한 배당으로 많은 상장사의 주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인천미두파동이 당시의 투기꾼들에게 큰 피해를 남겼지만 기업 수익의 상당 부분이 주주들에게 돌아갔었다는 점만큼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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