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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20선] 7. 금융.증권
입력1999-12-20 00:00:00
수정
1999.12.20 00:00:00
<금융부문>◆중앙은행제도 도입(조선은행 설립·1909년)
우리나라 중앙은행제도의 뿌리는 90년 전인 1909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구(舊)대한정부는 일본 통감부와 「한국중앙은행 설립에 관한 협정」을 맺으면서 공포한 「한국은행조례」에 따라 구한국은행을 설립했다. 구한국은행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침략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제도를 바꾸면서 1919년 8월 조선은행으로 개편된다.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제도는 통화신용정책 확립이라는 본래 목적에 앞서 불행히도 일본 산업자본의 대륙 침투를 위한 수단으로 첫 발을 디딘 셈이다.
◆화폐개혁(1962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통화개혁은 한국전쟁 뒤인 1953년 2월15일과 군사쿠데타 후인 1962년 6월9일 두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53년의 1차 통화개혁은 전쟁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모든 원(圓)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원화의 100배에 해당하는 새로운 「환」화를 발행했다. 정부는 모든 원화표시 돈을 금융기관에 넣게 하고 1인당 5만원까지 100원당 1환으로 교환해 줬다. 62년의 2차 통화개혁은 군사쿠데타 후 많은 돈을 푼 군사정부가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환」화 사용을 금지시키고 원화를 10분의 1로 평가절하해 새로운 「원」화로 대체, 유통시켰다.
◆8·3 긴급금융조치(1972년)
72년 8월3일 정부가 단행한 기업 사채동결 조치를 말한다.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모든 사채권자로 하여금 사채를 신고하도록 했으며, 원금은 3년간 거치하고 5년에 걸쳐 6개월마다 10%씩 변제하도록 했다. 사채동결은 경제성장에 따른 만성적인 인플레, 고리사채의 폐해, 기업의 과도한 부채 부담, 경영의 낙후성 등을 돌파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개인재산권을 국가가 강제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초법적인 조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1982년)
사상 최대 규모의 금융사기 사건으로 검찰은 1982년 5월5일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권력의 후원을 받아 81년 2월부터 82년 4월까지 6,404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어음사기 행각을 벌이다 82년 5월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사회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이 일었으며, 공영토건·일신제강 등 몇몇 기업이 도산하고 조흥은행장과 상업은행장이 구속되는 한편 검찰총장이 교체됐다. 재판결과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에 40만달러, 8,000만엔 몰수와 추징금 1억6,254만원을 선고받았다.
◆금리자유화(1991년)
91년 11월21일 1단계 금리자유화조치 이후 97년7월까지 4단계에 걸쳐 금리자유화가 진행됐다. 97년 저축예금, 3개월 미만 자유저축예금, 기업자유예금등의 금리가 자유화되면서 금융권 전체의 금리자유화율이 92%를 넘어섰다. 금리자유화로 상호신용금고의 각종 예금과 종금, 투신의 저축상품 금리가 자유화돼 제2금융권 기관들이 은행권과 금리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금리자유화는 국제수지 흑자 규모가 늘어나면서 시장 개방압력이 커짐에 따라 실시된 것으로, 금리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이 없어졌다는데에 그 의의가 있다.
◆금융실명제(1993년)
93년 8월12일 대통령 긴급재정명령 제16호에 의거, 전격 실시됐다. 80년대초에도 몇차례 실명제 실시 시도가 있었으나 재벌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시행이 미뤄져왔다. 정부는 금융거래의 정상화를 기하고 과세형평을 도모하여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금융기관과 거래할 때는 반드시 실명을 사용해야 하며 비실명 금융자산에 대해서는 단계적으로 실명전환하도록 했다. ◆OECD 가입(1996년)
96년 10월25일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회원국이 됐다. 95년 3월29일 가입을 신청한지 1년 반만이다. 우리나라는 97년1월3일 「OECD 대한민국 대표부」를 설치해 회원국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경제 선진국 모임인 OECD 가입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OECD에 가입한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서두른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가입한 후 1년만에 외환위기를 맞았고, OECD가입에 따른 무리한 개방이 원인이 됐다는 비난이 일었다.
◆통합 금융감독원 발족(1998년)
98년1월 출범한 통합감독 기구로 한국은행,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재정경제원, 신용관리기금등이 분담해 온 금융기관 감독업무를 통합한 무자본특수법인이다. 금융감독원은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외에 금융기관과 금융소비자간의 금융분쟁을 조정하는 기능도 맡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99년 출범과 동시에 외환위기를 촉발한 금융관행을 개선하고 금융구조조정, 기업구조조정을 지휘하는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다. 5개 은행을 퇴출시키고 종금, 증권, 투신사 등 금융기관 전반에 대한 통폐합을 추진했다.
◆은행구조조정(1998년)
IMF 한파는 금융권에도 몰아닥쳤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던 은행이 결국 문을 닫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동남 동화 충청 경기 대동은행이 98년6월 계약이전방식으로 정리됐고, 조흥 상업 한일 강원 충북 외환 평화은행 등 7개 은행이 합병 추진과 외자유치 등을 전제로 조건부승인 판정을 받았다. 또 부실규모가 큰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각각 해외에 매각되는 비운을 맞았다.
◆제일은행 해외매각(1999년)
국내 시중은행 중 선두주자였던 제일은행의 부실이 심해져 미국 대형 투자기관인 뉴브리지 캐피탈사에 5,000억원에 매각됐다. 97년 12월 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제일·서울은행을 해외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뉴브리지사와 협상을 거쳐 98년 12월31일 양해각서, 99년 9월17일 투자약정서를 체결하고 12월에는 본계약까지 끝내고 조만간 매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증권부문>
◆증권거래소 개장(1956년)
1956년 3월3일 명동에 대한증권거래소가 개장돼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증권시대가 개막됐다. 공식적으로 허가된 최초의 주식시장은 일제시대인 1920년 8월 문을 연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이지만 당시에는 일본 경제불황의 여파로 거의 매매가 없었다. 사실상 최초의 증권시장인 대한증권거래소에 상장 당시 매매종목은 주식 12개와 채권 3개에 불과했다. 조흥은행, 저축은행(제일은행), 상업은행, 흥업은행(한일은행), 경성방직, 경성전기, 조선운수, 조선공사등이었다.
◆증권파동(1962년)
1962년 5월에 발생한 증권파동은 한마디로 대한증권, 연합증권금융, 한전주등을 싸고 매도세력과 매수세력간에 치열한 공방을 벌이다 결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5월들어 일부종목의 매수세력이 작전을 통해 주가를 폭등시키자 이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공매도로 맞섰다. 이에 따라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5월 한달동안의 거래대금이 거래소 개장 이후 6년간 총거래대금과 맞먹을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양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래대금을 월말에 제대로 수도결제하지 못하고 6월4일에야 겨우 마무리했다. 이 여파로 증권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고 투자자들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건설주 투기(1977년)
국내건설사들이 70년대 후반기들어 중동에서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어들여 큰 활황을 보였다. 당시 국내건설사들은 한해 10억달러가 넘는 외자를 중동에서 벌어 들였고, 20만명이 넘는 건설근로자들을 해외에 송출시키는 등 경제성장의 견인차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증권시장에서는 건설종목시세가 급등, 묻지마 투자가 성행했다. 한해 10배이상 오른 종목이 속출했고 건설과 관련없어도 건설상호만 붙으면 상한가를 기록했다. 하지만 2차 석유파동과 10.26사태등의 악재로 폭락세로 돌아선 건설주는 이후 해를 바꿔가며 날개없는 추락을 계속했다.
◆코리아펀드 뉴욕증시 상장(1984년)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외국인들의 수익증권으로 84년 7월에 설립됐다. 초기자본은 6,000만달러였으나 86년 5월 4,000만달러를 증자해 자본금을 1억달러로 늘렸다. 코리아펀드는 같은 해 8월일 뉴욕증시에 상장됐으며 87년3월에는 기본 성격이나 운용구조가 같은 코리아유럽펀드가 설립됐다. 이 펀드는 1주당 10.71달러로 3,000만달러의 공모와 함께 런던거래소에 상장됐다.
◆3저호황(1986년~1989년)
80년대 중반부터 국내경기가 저유가, 저금리, 저엔화 등 소위 3저 효과에 힘입어 호전되기 시작했다.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는 등 풍부한 시중유동성에 실물경기 호전이 겹쳐 주식시장은 자연스럽게 대세상승기를 타기 시작했다. 자본자유화와 부동산투기 억제책등 정부의 정책도 주가상승을 도왔다. 85년 11월부터 상승하기 시작한 증시는 86년 들어서는 연간 12%의 고도성장에 힘입어 상승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89년 3월31일 마침내 주가지수 1,000포인트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중 종합주가지수는 6.2배나 올랐고 포철등 국민주 공모는 증권대중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12.12증권시장 안정책(1989년)
증시는 89년 4월1일 종합주가지수 1004.77포인트를 기록한 후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자금사정 악화, 수출부진, 경기전망 불투명등에다 금융실명제 가시화까지 겹쳐 몇번이나 폭락장세가 연출돼기도 했다. 연중최저수준인 844포인트까지 하락한 12월12일 정부는 전격적으로 시장개입을 발표한다. 투신사의 무제한 주식매입을 주요 골자로 하는 초강경 증시안정화대책을 내놓았다. 당시 정부의 지시에 따라 무제한으로 주식을 매입한 투신사들은 이후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되고 결국 부실금융기관으로 전락해 지금까지 그 부담을 안고 있다.
◆외국인 직접투자 허용(1992년)
외국인들에게 증시가 개방된 것은 92년 1월3일. 이후 외국인들은 기업가치를 기초로 재무구조가 건실한 우량기업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내재가치에 따른 투자패턴을 선보이며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국내 증시에서 이익을 내는 투자가는 외국인밖에 없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제는 외국인 주식보유비율이 50%를 넘는 상장기업이 상당수에 달하는 등 바야흐로 증시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주가지수선물시장 개장과 코스닥시장 발족(1996년)
코스닥시장은 상장기업들의 주식이나 채권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사고 팔 수 있는 증권거래소와는 달리 매매를 위한 건물이나 플로어 등이 없이 컴퓨터와 통신망을 이용해 장외거래 주식을 매매하는 전산거래 시스템이다. 96년 7월1일 코스닥증권이 개설됨에 따라 단순히 증권거래소 상장을 위한 예비적 단계였던 장외시장이 미국의 나스닥처럼 자금조달 및 투자마당으로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또 주가변동성 증대와 함께 주식투자의 기관화현상 심화 등으로 주가위험을 회피할 수단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이 날로 커짐에 따라 95년5월 주가지수선물시장이 공식 개설됐다.
◆사이버증권거래 허용과 확대(1997년)
정부는 97년 4월 사이버증권거래에 관한 시행령을 신설, 사이버증권거래를 허용했다. 사이버증권거래는 활황장세를 맞은 올들어 싼 수수료와 거래의 편리성등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99년 1~10월까지 주식 선물 옵션을 포함한 사이버증권 거래규모는 260조에 달해 전년동기 대비 64배나 늘어났다.
◆토요휴장제 실시(1998년)
98년 12월7일부터 토요휴장제가 실시됐다. 토요일에 시장을 쉬는 대신 평일 주식매매시간이 오전 9시에서 12시로 연장됐고 가격제한폭도 상하 12%에서 15%로 확대돼 증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거래량이 3억~4억주로 대폭 늘어났고 거래대금 역시 수조원대로 불어났다. 토요휴장제 실시로 국내와 세계증시의 주가변동성이 심해지는 등 시장매매패턴도 크게 달라졌다. 또 매매시간이 늘어나면서 하루 주가변동폭이 극심해져 투자리스크도 상대적으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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