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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12.첫 배본 첫 수금

12월 전에 책을 내기 위해 하루 하루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보냈다. 내가 출판시점을 12월 전으로 맞추려고 노력한 이유는 당시만 하더라도 어린이책의 경우 크리스마스 시즌에 선물용으로 많이 팔렸기 때문이다. 어린이용 책이다 보니 표지와 본문 모두 칼라로 하기 위해 원색 분해를 해야 했는데 서울에서도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았고 시설마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시대였다. 거기다가 석유파동으로 원색분해 비용이나 필름 값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 제작비는 당초 예상을 크게 초과하는 상황이었다. 원색분해 필름은 계획보다 한참 늦은 12월3일, 비용을 100% 지불하고서야 인수할 수 있었다. 종로에 있는 `이우인쇄`로 인쇄소를 정하고 그림책 용지(마닐라지)와 색칠하기용 도화지 등 필요한 종이는 현금으로 구입해 보내줬다. 출판사 사무실은커녕 정해진 연락처 조차 없어 간단한 일은 대부분 공중전화로 처리했고 꼭 확인이 필요한 일이라면 종로나 을지로, 서대문 등 어디든 발품을 팔아가며 돌아다녔다. 내가 만드는 책은 4도 칼라 그림책이어서 오프셋 인쇄를 해야 했는데 용지를 한 장씩 손으로 밀어넣어야 했다. 4도 색상은 한꺼번에 인쇄되지 않아 색상별로 4번 인쇄를 했다. 특히 잉크가 빨리 마르지 않아 인쇄 속도 역시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삼원색 인쇄가 끝나고 먹판 인쇄를 하는데 화사하던 컬러 그림이 온통 거무죽죽해진 것이다. 인쇄소에서는 필름이 잘못되어 그렇다며 다시 해오라고 했다. 부랴부랴 원색분해를 해준 사람을 찾아가 다시 작업해 달라고 하자 분해비를 다시 내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예정일보다 늦어져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나는 필름을 챙겨 들고 을지로 제판소로 갔다. 의논 끝에 글자 외에 검정 색을 모두 지우고 다시 찍어 보았더니 다행히 컬러 그림이 선명하게 살아나는 것이었다. 인쇄는 12월10일 끝났다. 인쇄물을 종로 세운상가 부근 문창제책사로 옮겼다. 한쪽 면만 인쇄된 두꺼운 종이를 맞붙여 만드는 합지 그림책(보드북) 제본은 접지부터 풀칠을 해서 붙이는 과정까지 모든 작업을 손으로 해야만 했다. 본드 같은 접착제가 나오지 않아 제본소마다 쌀죽이나 밀가루 풀을 사용했다. 풀기가 다 말라야 제본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한겨울 추운 날씨여서 합지는 쉽게 잘 마르지 않았다. 궁리 끝에 연탄 불을 피워 놓고 제본소 안 곳곳에 늘어놓아 말렸다. 아침이면 출근하듯이 제본소로 가서 일이 끝날 때까지 일손을 도우며 함께 작업을 했다. 작업장에 한참 있다 보면 어느 샌가 연탄가스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도 했지만 약을 사먹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인쇄물이 제본소로 넘어간 지 일주일이 되던 12월16일 저녁, 1차 200부씩의 책이 완성됐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첫 작품`이었기에 마음은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좀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마침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일요일이라도 쉬는 곳은 많지 않았다. 서점의 경우 거의 연중 무휴로 문을 열었다. 나는 미리 만들어 놓았던 케이스(코스모스 그림책)에 그림책을 3권씩 넣어 10세트를 묶고, 낱권 각 10부와 색칠하기 10부를 따로 묶어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책을 들고 제본소를 나오니 이미 거리는 캄캄했고 겨울 바람에 손이 깨질 듯 시렸다. 그 길로 버스를 타고 동인천 동인서적으로 갔다. 조원하 사장은 책을 보더니 고생했다면서 나보다 더 기뻐했다. 그는 책값을 어음으로 끊어 주고 대폿집으로 손을 잡아 끌었다. 첫 배본, 첫 수금은 그렇게 기념했다. 두어 잔의 대포를 나눈 후 서울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사기충천 그 자체였고 인생은 결코 힘 들지 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태평양출판문화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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