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려시대 대문장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東明王) 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錦席鋪絢明(금석포현명)/ 金준置淳旨(금준치순지)/ 편(足+扁)선(足+遷)果自入(과자입)/ 對酌還徑醉(대작환경취)/ 王時出橫遮(왕시출횡차)/ 驚走僅顚(경주근전)지(足+質)/ 長女曰柳花(장녀왈유화)/ 是爲王所止(시위왕소지)
비단자리 눈부시게 깔아/ 금준미주(金樽美酒) 차려 두니/ 생각대로 자래(自來)하여/ 대작(對酌)터니 취했구나/ 이때 왕이 가로막자/ 놀라 뛰다 넘어지네/ 장녀(長女) 이름 유화(柳花)인데/ 그를 왕이 잡았구나.
여기서 왕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를 말한다. ‘金준置淳旨(금준치순지)’라 할 때, ‘준(준)’은 술 단지를, ‘순(淳 또는 醇)’은 독하고 진한 술을, ‘지(旨)’는 맛있는 술을 의미한다. 동생들과 함께 맛있는 술에 취해 있다가 그만 해모수의 연정에 붙들린 유화는 애처롭게도 아버지 하백(河伯)에게 쫓겨나고 얼마 후 주몽을 낳는다. 주몽은 장성하여 우리 역사 속에서도 가장 빛나고 거대했던 제국, 고구려를 건국한다.
어느 나라 역사 속에 이처럼 달달하고 로맨틱한 술의 역사가 있는가. 어느 나라 건국 신화가 웅혼했던 제국을 건설했던 왕의 탄생에 술이 짝지어준 인연이 등장하는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후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술과 그 문화는 왕조가 바뀌고, 시대가 변천하면서 살포시 때로는 불같은 격정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
안타까운 것은 수천 년을 내려오며 다양하고 풍부하게 화려함을 구가했던 우리 술과 문화는 불과 1세기 전 일어났던 일제침탈로 대부분 단절되고 마는 고난을 겪으며, 옛 영광을 부활시키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다. 1930년에 일본총독부에 신고한 가양주(家釀酒) 제조자 수는 42만여 명으로, 이는 당시 가구 수 300만의 7분의 1에 이르는 숫자이다.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있을 것을 감안하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술은 농사일이나 손님 접대, 제사나 장례식, 결혼식이나 각종 잔치 등 우리 생활 중심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도 일제치하의 주세법과 제도는 그대로 답습되어, 일본식 주조방식으로 만든 술이 우리 전통의 술로 둔갑되어 일본에서 종균을 수입해오는 등, 지금 우리 술이라고 알고 있는 것 중에는 우리 술이라고 자부심을 갖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의 것이 많다. 무엇보다 딱한 것은 이것저것 첨가한 값싼 술의 단맛에 젖어버린 입맛을 돌리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나마 1994년 ‘조세범처벌법’ 신설 규정에 따라 자가소비용(自家消費用) 술을 빚어 먹는 것이 허용되어, 일부는 제 손으로 직접 술을 빚어먹고 있기는 하나, 한번 사라진 문화를 복원하고 확산시키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더욱이 각 지역에서 우리 술 독립운동가와 같은 분들이 나와 우리 술의 맥을 계승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알아주고 찾는 이가 적다.
이제 곧 추석이다. 오랜만에 찾아가는 고향 길 조상을 모시는 정성을 담고 싶다면, 가게에서 손쉽게 일본식 청주를 사가지 말고, 집에서 손수 빚은 것은 아니더라도 아무런 첨가물 없이 정말 제대로 빚은 우리 술 한 병을 사서 예를 올려 보자. /이화선 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 향음 원장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