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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감내해야 할 진실
입력1998-09-27 18:12:00
수정
2002.10.21 23:08:17
아시아 위기는 아시아의 붕괴로 이어졌다. 타이·인도네시아·한국 경제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고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난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 됐다. 인기 절정에 있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까지도 IMF를 비판하는 대열에 들어섰다.
개도국들이 이렇게까지 될 줄 처음부터 몰랐던 것도 죄라면 IMF는 분명히 죄인이다. IMF는 바로 몇해 전 미국 돈의 지원을 듬뿍 받아가며 멕시코 구제에 성공했지만 아시아 구제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판명났다.
그러나 국수주의자인 마하티르 모하메드 말레이시아 총리, 하버드대의 제프리 삭스 교수, 학계의 통화위원회 지지자 등 IMF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대안을 들여다보면 어느것 하나 그럴 듯한 처방이 없다.
나는 불가피한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인 효율과 번영을 위해 자본의 자유이동은 불가피하다. 태환이 자유롭다 보면 때때로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투기자들을 엄단한다고 해서 자본시장의 병리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법으로 자본이동을 통제,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볼 때 시장통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교묘히 법망을 피하고 시장을 왜곡시킨다.
미 달러가 고평가돼 있었던 60년대 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경제자문관으로 당시 미국 정부가 취한 외환통제 정책의 부작용을 체험할 수 있었다. 마침내 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브레튼 우즈 체제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하자 경제학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난국에 처한 국가는 힘든 선택을 해야만 한다. 러시아는 무작정 루블화를 찍어내서는 안된다. 결과는 기하급수적인 인플레를 조장할 뿐이다. 러시아에서는 세금도 제대로 걷히고 있지 않다. 임금을 받지 못하는 병사들이 언제까지 충성을 맹세할 수 있을까. 광부들은 언제까지 임금을 주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을 것인가. 현실경제는 난마처럼 얽혀 있다.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정상적인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망가진 경제를 어떻게 정상적인 경제로 만들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경제학은 가능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제프리 삭스는 미국이 2차대전 직후 유럽 부흥을 위해 마셜 플랜을 실시했던 것처럼 선진국들이 아시아와 러시아를 구제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진국의 어떤 국민도 개도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한국이 단지 단기적인 유동성 위기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채무만기가 지난해 연장됐다 하더라도 채무자들은 5년, 아니 10년이 지나서야 채무를 갚을 수 있거나 아예 갚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공황 시절인 31~33년 1만개의 미국 은행이 파산했지만 호시절이 돌아온 후에도 채권자나 예금자들은 단 한푼의 원금도 건지지 못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 파산한 금융기관을 처리하던 벌처자본조차 싸게 나온 이들 은행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서에 의하면 천지창조는 7일만에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미 파산을 경험한 지구촌의 다음 세기에는 보다 강해진 금융기관이 등장할 것이라는 다윈의 진화론적 접근이다.
한국의 노동력은 우수하고 기업들은 세계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정부가 돈을 풀고 있지만 부실채권에 시달리는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꺼려 신용경색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일본에서도 은행과 기업들이 무담보 채권으로 절망의 수렁에 빠져 있다. 다행히도 일본은 순(純)채권국이고 대부분의 부채가 엔화 표시로 되어 있다. 달러표시 부채였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금융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시중에 돈을 돌게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30년대 대공황 시절, 미 은행들은 대출을 극력 회피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종의 재건금융공사를 설립, 공공 프로젝트와 기업의 투자재원을 조달했다.
한국도 한국인 특유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발휘,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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