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결정적인 계기가 무르익지 않는 한 발톱도 숨기고 이빨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승부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먼저 움직이는 자가 위험하다는 것을. 이창호가 세계 최강의 고수로 인정받는 것은 그의 신중성 때문이다. 매력적인 수단이 있는 경우라도 그는 여간해서 칼을 뽑지 않고 조용히 지나간다. 칼을 뽑는 순간 자기 목도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흑27은 너무도 매력적인 강수였다. 백의 연결고리에 남아있는 허점을 정통으로 문책한 수였다. 그러나 검토실은 이 수를 의문수라고 지적했다. 장쉬의 덫에 뛰어든 경거망동이었다는 지적이었다. 유창혁이 기대한 것은 참고도1의 백1이었다. 그것이면 2로 잇고나서 4로 차단하는 맹렬한 수단을 구사할 예정이었다. 그것을 간파한 장쉬는 실전보의 백28로 젖혔다. 이렇게 되면 백32까지는 외길수순이다. 여기서 10분 동안 숨을 고른 유창혁은 33으로 몰아 버렸다. 가장 강경한 노선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검토실의 고수들은 일제히 혀를 끌끌 찼다. 참고도2의 흑1로 자중할 자리라는 지적이었다. "장쉬가 처음부터 난전으로 나오니까 유창혁이 약이 올랐던 것 같아요. 혼을 내줄 생각이 든 것인데 그게 나빴어요." 강훈9단이 하는 말이었다. 유창혁의 수읽기에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음이 곧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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